바라볼 때마다 변하는 것이 산이다. 결국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것이다. _유영국 Mountains change everytime I look at them. Therefore, the mountain is not in front of me but inside of me._You Youngkuk
내면에 언제나 중용Golden Mean을 지키고는 싶은데, 쉽지 않은 현실!
여유롭고 충만하게 주말을 보냈던 지난봄, 여름의 평범한 일상들이 무척이나 그리워지는 가을입니다. 큰 아이의 취학을 앞두고 무작정 회피하고 싶었던 중차대한 의사 결정들의 기한이 임박했거든요. (이미 늦..었으려나요) 현재 살고 있는 지역이 맞벌이 어른들의 생활에는 무척이나 편리한 곳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아쉬운 환경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갑자기 지난 시간들을 모두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업무의 많은 부분이 프로젝트의 일정을 세분화하여 챙기고, 일어날 수 있는 사건사고를 예측해 적기에 원하는 성과를 내는 것입니다만, 정작 제 인생의 중요한 우선순위의 과제에서는 손을 놓고 있었다는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갑자기 이사를 알아보려니 빠듯한 일과에 쥐어짤 체력도 없고 완전한 소진 모드였네요.
그래도 이 전시만큼은 놓치면 안 될 것 같았기에, 부서진 몸과 마음을 다잡아 하루 점심을 온전히 내어보기로 했습니다. 갤러리로 향하는 마음이 이만큼 간절한 적이 있었나 싶어요. 바로 PKM에서 열리는 한국의 1세대 추상화가 유영국 작가(1916-2002)의 개인전 <유영국의 자연: 내면의 시선으로>이었습니다. 워낙 작가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최초로 대중에 공개되는 작은 캔버스에 그려진 소품들을 꼭 보고 싶었거든요.
YOU YOUNGGUK, <Work> 1960s/1970s, Oil on canvas
유영국(1916-2002)은 한국 현대 추상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명입니다. 산과 자연을 모티프로 한국적 색채와 숭고한 추상 표현을 담은 작품을 여럿 남겼습니다. 일본에서 유학하며 서양 미술을 익혔고, 귀국 후 다양한 현대 미술 운동에 참여하면서 색과 형태의 조화를 통해 자연의 생명력과 정신을 독창적으로 형상화해 나갔지요. 저는 평소 또렷한 선과 색채로 캔버스를 분할해 나가는 유영국 작가 특유의 조형미를 애정합니다.
PKM의 문지기 같은 육중한 철문을 열고, 각종 문제와 고뇌로 가득한 오늘의 현실을 잠시 잊은 채 그저 작품 속으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빨강, 노랑, 오렌지, 초록빛의 원색이 한 겹 한 겹 칠해진 캔버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잠시 숨 쉴 틈이 생기는 듯했지요. 산인지, 그저 덩어리인지 그것이 구상인지 추상인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믿는 바를 올곧은 예술로 풀어냈던 유영국의 작가 정신이 유독 더 귀해 보였네요.
현실적인 생계의 문제는 작품 겉으로 직접 드러나지는 않습니다만, 작가의 세계를 탐험하는 데 중요한 배경 지식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경북 울진이 고향인 작가는 해상 어업의 지주 집안에서 자란 덕분에 유복한 환경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지만, 한국 전쟁 이후 가세가 기울어진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기 위해 잠시 화업을 내려놓고 양조장을 운영하는 등 현실적인 생업에 매진해야 하기도 했었지요.
"돈은 살아가는 데 수단이 되어야지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돈이 없어도 그림을 못 그리지만, 돈이 너무 많아도 그림을 못 그린다." 작가는 현실적인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예술에 허기진 마음을 쉬이 지나치지도 않았습니다. 울진의 나무로 울창한 산과 무한한 바다,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을 매개로 그가 이룩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조형미의 근원, 점, 선, 면, 형, 색을 이루는 원리들을 파고들었지요.
이번에 새로이 소개된 작은 캔버스 작품들도 그 안에서도 치열하게 자기 이야기들을 해내고 있었습니다. 저마다의 봉우리 같은 삼각형, 시선을 잡아끄는 능선의 곡선, 원근의 면 분할, 캔버스의 사이즈가 크든, 작든 명징하게빛나는 그 색감은 한 없이 쪼그라진 저에게도 더 부딪혀 보라고 응원해 주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공간을 압도하는 1ml 이상의 대작도 좋지만, 30cm의 작품들도 충분하게 울림이 깊고 의미심장했네요.
이번 전시의 영문 주제가 그제야 들어옵니다. <유영국의 자연: 내면의 시선으로 Yoo Youngkuk:Stand on the Golden Mean> 주관적으로 해석된 자연에 더 초점을 맞춘 국문 전시명과 조금은 다른 의미의 영문 제목인데요. ‘중용 Golden mean’이란 끊임없는 자기 조절과 절제를 통해 양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이룬 상태를 의미한다는 뜻입니다. 전시는 유영국의 자연, 중용의 미학 위에서라는 의역도 가능할 것 같았어요.
예술이 주는 위로는 이 중용에 가까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나 현실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없이 불공평한 것 같고, 끝나지 않는 고행처럼 느껴지는 날들도 자주 찾아오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마다의 산을, 또 삶을 그리며, 인생의 황금률을 찾아가 보자는 한결같은 응원말이에요. 어렴풋하게 전해오는 작품의 숭고한 속삭임들에 취해 현재를 잘 정돈해, 다시 소박한 가치들로 가득 채워볼 용기를 얻었습니다.
창 밖 초록의 풍경과 더 어우러지는 초록 계열의 작품, <Work>, PKM+ 별관 전시 풍경.
특유의 조형미가 담긴 초기 사진 작업. 모던 보이임이 틀림없는 작가의 젊은 시절. 노년의 작가와 그의 아내 인터뷰 영상
통영이 고향인 사장님이 운영하는 남대문 노포 맛집. 이모카세도 먹음직스럽다고 하네요.
직접 울진까지 가 볼 수는 없다만 찐한 바다의 맛이 생각나 향한 곳은 회사 선배의 단골 노포인 남대문 '그냥 밥집'입니다. 반어적으로 그냥 밥이 아닌 제철 해산물이 듬뿍 담긴 한상 메뉴가 준비된 특별한 식당이지요. 뜨끈한 굴/명란국밥이 점심의 시그니처 메뉴라지만, 저는 바다향 그득한 멍게비빔밥에 이끌렸습니다. 무한 리필이 가능한 견과류 듬뿍 연근조림에, 생미역, 파김치, 브로콜리두부무침, 도토리묵 등 손맛정성 가득 담긴 밑반찬도 풍성하더군요.
무심하게 나온 멍게비빔밥 한 그릇 속 선, 면, 빛깔의 조화로움이 제법입니다. 유영국 작가의 색면추상 그림을 닮은 듯 주황빛이 그윽한 멍게가 중심을 잡아주고, 초록의 오이채와 흰 빛 배채, 검정 김가루까지 재료들이 놓인 구성이 색다르게 보였습니다. 막 썰어내어 바다 내음이 깊이 스며든 특유의 멍게 향이 입안 가득 퍼져신선한 바다의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어요. 아트 앤 노포로의 도피를 아름답게 마무리해 주는 절정의 순간이었네요.
'자연의 관찰과 자기 탐구에 기반한 가장 순수한 추상의 세계'를 펼쳐낸 유영국 작가의 예술은 그 자체로 온전하게 추구해야 하는 우리네 삶의 한 이정표를 보여줍니다. 작가의 내면에 존재하는 산을 반복해 그린다는 행위는예술의 목적을, 그리고 추상적인 예술적 이상을 열망했던 삶 자체를 담은결과물이었던 것 같아요. 그 과정에 필연적으로 맞닥뜨렸던 현실은 시간이 걸려도 방법을 찾아내어 해결해 내면 되는 부차적인 문제였고요.
중용을 지키는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부단히 더 욕심을 내려놓고, 당장 제가 할 수 있는 현실적인 일들을 챙겨보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에게 지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듯한 현재가 아이들에게도 최선이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그래도 조금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조금 더 힘을 내어 차근차근 제 마음 속 산을그려내보려고합니다.
덧)여유가 없어서 글을 만날 시간이 없었다고 하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겠지요. 자율적인 글쓰기에 마감이 없다는 핑계로 선뜻 글로 옮기는 일에 여전히 게을렀음을 반성하며 오늘의 글도 마무리합니다. 지금 이 순간, 이 글을 만난 당신에게도 일상의 모든 순간 속 충만한 조화와 균형 잡힌 만족감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 제발 자주 더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