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부족한 내가 엄마가 되어도 될까?
'앞모습과 뒷모습이 그렇게 반반씩' 나를 전체적으로 대표해주는 키워드였다.
세상에서 단 한 권뿐인 '내 마음 보고서'를 들췄다. 그 보고서는 친절하게도 내가 그린 나무 그림으로 시작해 심리분석 시스템으로 정리한 2가지 심리 코드를 알려주었다. 가장 두드러지고, 다른 사람들의 평균 속성과 비교해도 뚜렷이 구분되는 나만의 고유한 특성이었다.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품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이 특성들은 매력이나 독특함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결정적인 결함으로 비칠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앞으로 내가 맺게 될 아기와의 관계를 위해 나를 더 잘 알고 싶었다. 그 모습이 객관화된 결과라면 더 좋았다. 나는 아기에게 앞으로 이전까지의 어떤 관계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친밀감과 애착, 그리고 전폭적인 관심을 집중해서 쏟게 될 터였다. 한 사람의 두드러진 심리는 어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장점으로 작용하지만, 다른 누군가와는 고통스러운 관계를 맺는 근원이라고 했다.
아기는 태어나고 한참 동안은 생존을 위해 누군가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존재였다. 그 아기를 위해 더 온전히 성숙한 나를 내어주고 싶었다. 나무의 전체적인 상은 나의 자아상을 반영하는 그림이라는 해석이 붙었다. 어쭙잖은 그림 솜씨로 나는 깊고 넓게 뻗어진 뿌리와 튼튼한 줄기와 나무기둥, 가지에 달린 열매까지 깨알같이 그려 넣었었다. 충만한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했다.
나에게는 개척자 정신의 심리적 특성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했다. 새로운 가능성에 직면했을 때 거기에 도사린 위험을 감지하고 이를 회피하거나 둘러가지 않고 어떻게 해보든 승부를 보려는 성향이 있다고 했다. 어려움도 기회라고 생각하고 이를 발판으로 한 단계 성장하려는 욕구가 두드러지며, 자신감이 높은 편이라는 결과가 있었다. 나 맞나? 싶을 정도로 결과를 보고 처음 든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임신을 앞두고 이렇게 불안하고 초초해 어쩔 줄 몰라하는 내가 개척자 정신이 강한 사람이었나 싶었다.
또 나는 주의 초점이 넓은 편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정신적으로 쉽게 소진될 수 있습니다. 생각이 한 가지 결론을 향해 나아가기보다는 서로 경주하듯 다투어 떠올라 산만해질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성격은 흥미를 느끼고 관심 있는 일에는 깊이 몰입하고 강한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머릿속에 잡념과 공상이 많아집니다." 이 대목에서 역시다 하고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지금 내 모습이었다.
이제 미루지 말고 곰곰이 임신이 두려운 이유에 대해서 천천히 내 감정을 살펴보아야 했다. '혹시라도 임신이 잘 안된다면, 임신으로 인해 살이 막무가내로 찌면 어쩌지, 혹여 유전적 문제를 선천적으로 안고 태어나면 어쩌지, 아파서 아기를 어떻게 낳지, 낳고 나면 개인 시간도 없이 24시간 아기를 돌봐야 할 텐데 항상 내가 중심이었던 삶에서의 변화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까, 남편이 배가 나온 내 모습을 보고 놀라지는 않을까. 커리어에 지장이 있지는 않을까.
걱정은 끝없이 이어졌다. 입덧으로 힘들어서 우울증이 오지는 않을까, 카페인이 듬뿍 든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은 날에는 어떻게 할까. 완벽한 태교를 하고 싶은데, 일을 병행하면서 가능하기는 할까. 임신선과 셀룰라이트가 안 없어지면 어쩌지. 살을 얼마나 찔는지, 마사지로도 안 빠지면 큰일인데. 이런 초조한 마음이 임신을 하고도 안 없어지면 어떻게 하지. 태아랑 엄마는 항상 연결되어 있다던데.
그런데, 이러한 막연하고 끝이 없는 두려움은 내가 실제 겪게 될 위험 이상을, 부정적인 영향만을 상정하고 있었다. 그 속에 아기와 함께 꾸려갈 충만한 삶, 변화로 인해 새롭게 바뀔 부모로서의 새로운 역할에 대한 기대는 전부 빠져있었다. 나는 내심 아기가 생기며 자연스럽게 생기는 모든 변화된 삶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부정적이고, 나라는 존재를 뒤흔들만한 위험한 시도로만 여기고 있었던 것 같았다.
임신 이후의 삶이 어떻게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을지 반대로 상상해 보기로 했다. 내 특기인 주의 초점을 넓게 확장시켜 다른 가능성으로 맘껏 펼쳐 발휘해 봐야 했다. 우선, 아기가 세상에 발을 내 딛기 전까지 오롯이 엄마인 내 뱃속에서 10개월을 지내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하나의 특혜이자 특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임신한 배는 얼마만큼이나 부풀어 오를 수 있을지, 몸 안에 새로운 생명체를 잉태하고, 키워내는 신비로운 변화를 직접 경험해 볼 수 있는 것도 이제야 행운처럼 받아들여졌다.
결코, 행복은 둘만 있을 때 항상 함께 있는 건 아니었다. 돌이켜보니 혼자여서 쓸쓸하고, 둘이어서 더 외로운 날들도 있었던 것 같았다. 태동이 시작되면 뱃속 존재가 그렇게 신기하고 귀여울 수가 없다고 했다는 선배의 호들갑도 기억이 났고, 오빠랑 나를 키우느라 하루가 고단한 줄도 몰랐다는 (그러니, ASAP 빨리 애나 하나 놓으라는) 우리 엄마의 잔소리도 떠올랐다. 요새 가끔은 둘이 있어도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기 싫은, 집에 퍼져 있어도 또 집에 가고 싶은 극복 불가한 무기력함에 버둥거린 날들도 생각났다.
무엇보다도 임신과 출산, 육아는 결코 나 혼자만 짊어지고 떠나는 묵언이나 면벽 수행의 길이 아니었다. 육아를 병행하며, 오히려 관대해진 마음과 업무 시간을 칼 같이 지키는 효율적인 일처리로 자신의 커리어를 탄탄하게 쌓아가는 회사의 엄마 선배들이 있었다. 남편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사람이었으니, 내가 임신으로 인한 심리적, 신체적 변화로 힘들어할 때 지금껏 그랬듯이 항상 내 곁에서 따뜻하게 있어줄 것이었다.
임신 기간 동안 최대한 좋은 생각만 하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 혹시 부족하다면 태교 강의를 듣거나, 관련된 책을 읽고 차근차근 주변의 임신한 친구를 찾아 실천해보면 될 것 같았다. 뱃속 태아의 안전이 걱정스러워 임신을 두려워하는 건 추락이 무서워 비행기를 안 타는 것처럼 느껴졌다. 해맑게 까르르 거리는 사랑스러운 내 아기의 보드라운 살결을 쓰다듬는 일은 우리 둘만 있었을 때는 상상할 수 없는 세상에서 제일 내밀하면서도, 위대한 세 명의 일상이 될 터였다.
그렇다면, 이제 원래의 나답게 스스로에게 대답해야 했다. "그래서, 아기를 맞을 준비가 된 것 같아?" 아무리 새롭고 낯선 변화라 할지라도 그동안 해온 것처럼 무엇보다도 직접 부딪혀 보고, 겪어내면 될 바였다. 그렇게 반반씩. 지나치게 두려웠던 감정은 사실, 금세 자신 있어질 수 있게 하는 근원이기도 했다. 아기가 가져다 줄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모습을 그리다 보니 기대감에 살짝 들뜨는 것 같기도 했다.
단호하게, 이제는 YES 였다. 내가 미처 잊고 있던 나의 심리적인 내면을 들여다보니 의외로 실마리가 쉽게 풀린 기분이었다. 그 딱 반반, 모순적인 감정의 근원은 내 마음의 특정한 모양에 기인해 있었던 것이었다. 이런 내 결심을 누구보다 빨리 남편에게 이야기해주어야 했다. 마치 세기의 프러포즈를 앞둔 것처럼 내 마음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진작에 왜 이렇게 생각하지는 못했을까 후회가 막심했다. 지난밤의 해프닝으로 인해 조금 냉랭해진 분위기를 내가 나서서 깰 차례였다.
삶의 의미, 결혼, 커리어, 임신과 출산. 그 자체로는 너무나 무겁고 거대해서, 미처 제대로 대면하기도 전에 지레 겁을 걸고 도망치게 하는 몇 가지 삶의 통과 의례가 있는 것 같다. 실제 겪어보고 마주하다 보면, 그럭저럭 잘 지내고 헤쳐나가는 방법을 찾기 마련인데 그전에 너무 잘 해내려는 욕심이 앞서 편협한 시각으로 대하기가 쉬운 것 같다.
별다른 사춘기도 없이 지나치게 무던하고 단조롭게 살아왔던 내 삶을 한 줄로 줄 늘어놓는다면 지금까지는 거의 진동도 없고 무심한 직선이었다. 그렇지만 앞으로의 나날에는, 임신을 결심하게 된 지금부터는 아마 어마 무시한 파동을 그리며, 꽤 오래 행복한 진짜 성장통을 겪을 것 같다는 조짐이 강하게 들었다.
아기가 있는 삶으로의 큰 도약만 남아있었다. 물론 아직도 내면에는 아이 같은 면도 많고, 성숙한 인격을 완벽히 갖춘 것도 아니지만 그럭저럭 해나갈 수 있을 자신감이 막연하게 생겼다. 내 마음 보고서 첫 장의 큼직한 나무도 좋지만, 이제는 내 아기에게만큼은 단단한 토양이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우리의 하나뿐인 소중한 아기가 세상의 따스한 햇빛도, 가끔은 거친 비와 바람도 충분히 겪어내 자기만의 뿌리를 내렸으면 한다. 그리고 고유한 향기를 지닌 꽃망울을 틔워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작고 여린 존재가 자라나며 겪게 될 작은 고비 하나하나 마다 살뜰하게 품어 주는 한결같이 단단한 엄마이자 대지이고 싶다. 그리고, 마침내 열매를 맺는 그날까지 서로의 단단한 응원과 지지의 토대 위에 펼쳐진 가족의 이름으로 함께하는 나날을 고대해본다.
이제서야 엄마가 될 준비가 아주 조금은 된 것 같다.
임신의 시작은 엄마의 마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