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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 Nov 27. 2022

커뮤니티 중독자의 하루


"오빠는 커뮤니티 중독자야"


오늘 아침 와이프와 산책 중, 핸드폰으로 커뮤니티 카톡방에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며 와이프가 건넨 말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이야 그게'라는 생각으로 넘겨 집으려 했더니,

이제는 머릿속에서 '커뮤니티 중독자'라는 단어가 떠나질 않는다.


"아, 그토록 끊어버리고 싶어 했던 '사람들'과의 커넥션을 이토록 찾게 되다니"


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탄식의 근원을 따라 시간을 돌아가 보자.


때를 거슬러 올라, 2021년 5월 몸이 갑작스레 크게 아팠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고, 나를 알던 사람들은 모두 나를 걱정하는 듯했지만 또는 그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열심히 살았고, 열심히 공부했고, 운이 좋았던 덕분에 좋은 직장에 취직해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부모님이 주신 성격과 은혜 덕분에, 사람들로 부터 크게 모나지 않은 나의 모습을 사랑받을 줄 알았고, 나는 또 그 사랑을 널리 퍼트릴 줄 아는 성격 덕분에 주위로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요즘 말로 따지자면 나는 꽤나 '힙'한 방향의 삶을 추구했던 것 같다.

회사에서는 일을 잘하며, 예의도 바르며, 대인관계까지 아우러지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던 시기였으니, 

나의 고개 또한 떨어질 줄 몰랐고, 회사에서는 '나'와의 연대가 있는 사람이면 꽤나 즐겁게 잘 놀 줄아며 대인관계도 좋은 사람들의 속하는 사람들로 평가받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순수하게 사람을 좋아하던 나의 모습에 반해, 회사라는 곳은 참 모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동안은 입댈 곳이 없었던 나의 모습에, 내가 아프기 시작하며 사람들의 '본모습'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걔, 그렇게 무리하더니 그렇게 될 줄 알았어"

"이번에 걔 아프게 된 게 그 일 때문이라며"

"그래서 걔 다시 일은 할 수 있는 거야?"


내가 아프기 시작하며 이런 수많은 루머와 궁금증들이 나의 귀를 통해 들어왔다.

그중에 가장 슬펐던 것은, 회사에서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기대 섞인 안부인사였다.

나의 안부를 묻는 듯 하지만, 나의 이야기를 가십거리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된 하이에나 마냥 그들의 안부는 듣기 조차 무서웠고, 이야기는 돌아 돌아 서울에서 까지 들려왔다.


너무나 궁금했던 나머지, 서울에서 나의 건강을 걱정한 친구에게 누구에게 소식을 들었는지 물었더니,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의 입에서 옮겨진 가십까지 들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었다.


"참 부질없구나"


회사에서 일말의 사랑과 기대, 그리고 사람과의 연대를 꿈꿨던 이상은 나의 철저한 체험을 통해 한 순간에 무너졌다.


'그래, 이토록 사회적인 공간에서 그토록 이상적인 인간관계를 꿈꿨다니'


나는 철저하게 혼자이고 싶었고, 그날 이후로 회사에서의 나의 모습을 삭제시키기로 했다.


어릴 때 인간관계에 있어서 나의 모습을 꽤나 철저하고 냉정한 사람이었는데, 오랜만의 그런 나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일상을 찾아가며, 나는 회사에서 7년간의 나의 모습을 삭제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나와 얼마만큼의 깊이와 인연에 관계없이 유년시절의 친구를 제외하곤 철저하게 나와의 관계를 삭제시켜 갔고, 고립되고자 노력했던 나의 모습 덕분에 회사에서 나는 매우 독립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동물이 아프면 식음을 전폐하고, 동굴을 파고 들어가 몸을 회복하듯 그렇게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의 단절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나의 지난 1년여의 수많은 삭제의 노력의 시간을 지나, 오늘 아침 산책길에서 들 은소리가


'커뮤니티 중독자'


라니, 나는 그 상처를 기억하지 못하고 또 사람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인것이가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별안간 '무섭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내가 또 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너무 빠져있는 것들은 아닌지, 나도 모르게 사람들과의 연대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아닌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선'을 넘는 사람들을 경계하기 시작한 것 같다.



과연 어디까지 묻고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 것일까.

호기심이 무례함으로 변질되는 순간을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승우의 경험이 하나 알려 준 건, 잘 모르겠을 때는 우선 멈추는 것이 낫다는 사실이었다.

질문해도 될지 모르겠을 대는 질문하지 말 것.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는 듣는 역할에 충실할 것.

이 두 가지만 지켜도 최소한 무례한 사람에선 벗어날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황 보름 -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선'을 아주 쉽게 넘는 사람들이 종종 목격된다.

나와 같이 '선'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꽤나 이런 사람과 함께하는 자리가 불편하다.

오랜 시간 이런 '선 넘는 사람들'을 지켜보니 반반의 확률로 '알고서' 또는 '모르고'의 두 분류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전자의 경우는 아주 치밀한 경우다.

이 사람의 속내가 궁금하거나, 이 사람이 표면적으로 나타내지 않는 건너편의 무엇인가가 굉장히 궁금한 경우다.

이런 사람들은 대놓고 '선'을 넘기 때문에 아주 불쾌하다.


하지만 후자의 '모르고' 선을 넘는 사람들의 경우, 그 순수함에 탄복을 하게 되지만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이런 '선'넘는 사람들을 찾아내고 멀리 하기 위한 식스센스를 아주 발달시키며 살아가고 있었고, 지금도 이런 사람들과의 대면함에 있어서는 아주 사회적으로 나와 그 사람과의 관계를 분리시키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커뮤니티 중독자'라고 불릴 수 있는 이유를 고심해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그곳에서는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존중하고, 나의 경계를 쉬이 넘보지 않고 담벼락 너머에서 나의 어떠한 모습에도 위로와 응원을 건넬 줄 아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이런 사람들이 내 곁에 있다니...'


이 글을 적어 내려 가며 이런 쉽지 않은 사람들과의 연대 속에서 이렇게나 행복해도 될 까라는 질문을 나에게 건네 보는 것이 참 행복해진다.




"네, 안도감이 들었어요. 저도 이런 느낌을 받는 게 신기하긴 했는데요. 그냥...., 여기에선 내 쪽에서 예의를

지키는 한 아무도 나에게 무례하게 굴지 않겠구나, 하는 그런 안도감이 들었어요. 그때 저한테 딱 필요한 느낌이었거든요. 그래서 더 자주 오고 싶었어요. 책은 읽지 않아도 이곳에 오는 게 좋았거든요. 그러다 죽순이가 됐고요"


-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황 보름 -



나는 요즘 책에서 나오는 정서의 말처럼 '그때 저한테 딱 필요한 느낌'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래서 그곳에서 더 오래 머물고 싶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더 많은 연대를 느끼며 살아가려 노력한다.


누군가 나를 가리키며, 모순적인 사람이라 욕해도 좋다.


나는 지금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의 연대가 좋고, 그들과 함께 숨 쉬며 이야기를 나눌 때면 나의 '숨통'은 크게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며 호흡한다.


이런 '신기한 사람들'과의 '딱 필요한 느낌'을 영원히 나눌 수 있다면,


나는 영원히 '커뮤니티 중독자'이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러닝 클럽을 운영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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