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0
눈이 왔다. 외국에서 맞는 눈. 더군다나 여긴 눈이 흔하지 않은 지역. 처음에는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서 걸어야 한다는게 못내 아쉬웠지만, 어느덧 내리기 시작한 눈에 그 아쉬움은 이내 옅어졌다. 눈은 진눈깨비로 흩날리다가, 머지 않아 거센 함박눈이 되더니, 또 머지 않아 다시 진눈깨비가 되었다. 눈이 내리는 게 워낙 드문 일이라,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몰라서, 자기 모습을 사람들한테 보여주려고 서로 안간힘을 쓰는 듯, 계속해서 다른 형태 다른 강도의 눈이 서로 자리를 빼앗고 또 내주는 일이 반복되었다.
어쨌든 눈이 내리니 기분이 좋았다. 진눈깨비가 함박눈으로 바뀌는 걸 볼 수 있어서 좋았고, 그 함박눈이 점차 거세지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처음의 진눈깨비도. 어떤 시인들은 진눈깨비는 함박눈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욕하지만, 그리고 거리 위의 많은 사람들이, 함박눈이 아니라고, 아니라서 눈이 쌓이지 않는다고 볼멘 소리를 냈을 지도 모르지만, 진눈깨비한테도 진눈깨비만의 사정이라는 게 있을 텐데. 사람도 넌 왜 이리 모자라니, 누구누구한테 폐나 끼치지 말고 적당히 좀 하고 빠져, 하는 소릴 들으면 기분이 나쁠 텐데. 진눈깨비만 보고 너무 뭐라고 하는 것도 좋지는 않은 일인 것 같다. 아무튼 함박눈은 점차 강해지다가 이내 진눈깨비가 되었고, 그래서 많은 양의 눈이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거리 위로 눈이 쌓이지는 않았다.
착 가라앉아, 차곡차곡 쌓여,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함박눈. 그 함박눈 사이에서 흩날리는 진눈깨비를, 어디에도 쌓이지 못하고 그저 왔다가 사라져 버릴 진눈깨비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진눈깨비가 누군가의 기억 속 한 구석에 잠시라도 쌓일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