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감정, 본능의 힘 인정해 주고, 들어주기
연간휴가를 맞아 한국을 방문하며 그리웠던 엄마와 아빠와의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처음 몇 주는 그리움이 가득한 만큼,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정말 소중하고 행복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느 가족이나 그렇듯,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존재에 익숙해지다 보니 작은 갈등과 불편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이 들어가는 부모님과 가까이 살면서 자주 시간을 보낼 수 없기에, 일 년에 한 번 있는 이 소중한 시간이 좋은 순간들로만 가득하길 바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순간들이 생겨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부모님의 오래된 갈등이 드러날 때면, 어른 자녀로서 그 문제에 개입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다른 형제가 없는 하나뿐인 딸로서, 먼 곳에 사는 내가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상황에서 부모님의 갈등이 그들을 힘들게 하고 외롭게 만든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내 안에 있는 어린아이가 무서워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이제 다 컸잖아. 이제 다 달래서 조용해진, 없어졌다고 생각한 어린아이가 왜 다시 튀어나오니. 더 이상 상처받거나, 아파하거나, 무서워하지 말아야 해. 이제는 성숙해진 '이성적인' 성인으로써, 엄마아빠에게 무조건 친절하게, 무조건 착하게, 좋은 딸이 되어야 해. 감정적으로 굴지 마.’
하며 어린아이의 반응을 무시하고, 없애버리려고도 했다. 이제는 성숙한 어른으로서 부모님께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고 다짐했지만, 감정을 억누르기란 쉽지 않았다.
며칠 동안 상처받은 마음을 억누르며 ‘이성적으로’ 행동하려고 했지만, 부모님이 여전히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면서 답답함과 짜증이 커졌다. 그러다 한국을 떠나기 며칠 전,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아, 이것은 내 소관이 아니구나."
부모님이 서로에 대한 묵은 감정을 없애고, 이성적으로 행동하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착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어린아이 반응도 이해해 주고, 부모님의 서로를 향한 ‘감정적인 반응’을 비판하거나 고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의 서로에 대한 감정적 반응도 이해해 주자. 그리고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한 부모님께 사랑과 따뜻함을 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자였다.
결론적으로, 나 스스로에게도, 부모님에게도 ‘이성적’이기를 강요하지 말고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우리는 이성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인간과 다른 동물을 차별화하는 특징으로 이성의 발달을 많은 사람들이 꼽곤 한다. 인간은 동물들보다 이성이 발달해 있으며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을 결정한다고 여기는 능력이 더 발달되어 있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생물학적으로도 인간의 뇌에서 논리적 사고를 관장하는 전두엽이 다른 동물들보다 훨씬 발달해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 문제는 이성만을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감정과 신체의 반응을 무시하게 되는데, 이는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을 간과하는 것이고, 이로 인해 부작용이 초래된다 (예를 들면, 위의 나의 최근 경험처럼 불필요한 감정적 고통이 야기된다).
우리 (인간)의 시스템에서는 이성뿐만이 아니라, 감정, 본능, 감각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의 신체는 체계적으로 감정과 이성을 조율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뇌의 구조를 살펴보면, 신체적인 안전과 안정감을 관장하는 시스템이 먼저 있으며, 그다음에 감정을 안정시키는 시스템이 위치해 있다. 그리고 이성은 신체와 감정이 안정된 상태에서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신체가 불안정하거나 감정이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이성이 마비되거나 제대로 기능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신체적 안전과 감정적 안정이 우선되어야 이성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Dr. Dan Siegel (Dr. Dan Seigel은 UCLA 의과대학에서 임상 정신과 교수로 재직 중)은 대인관계 신경생물학을 연구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손의 모양을 이용하여 위의 기제를 뇌의 신경생물학으로 설명했다.
Daniel J. Siegel, M.D. Mindsight: The New Science of Personal Transformation 2010, New York, NY: Bantam Books (참고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gm9CIJ74Oxw)
과도한 스트레스나 불안에 장기간 노출되면 감정 시스템뿐만이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수면 장애나 식욕의 변화, 자율신경계의 이상과 같은 시스템 교란이 생긴다. 이렇게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피로한 상태 (감정, 신체적 시스템이 불안정적일 때는)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전전두엽이 활성화가 안되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해석하는 현재 상황이나 과거 또는 미래에 대한 해석은 어쩔 수 없이 지금 압도가 된 감정과 신체 컨디션에 좌우된다 (우울하면 다 우울하게 보이고, 불안하면 모든 것이 불안하게 보이고). 이는 마치 노란 렌즈가 끼워진 안경을 쓰면, 모든 것이 노랗게 보이는 현상과 같다.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만이 아닌 감정의 힘에 많이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것은 경제학에서도 잘 밝혀진 사실이다. 의사결정 이론과 행동 경제학 분야에서 중요한 기여를 한 다니엘 카너먼(Daniel Kahneman)도 사람들이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적 요인에 대해 '이성적 사고'와 '감정적 사고' 두 시스템으로 나누어, 인간의 인지적 편향, 감정의 힘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했다. 즉, 우리는 이러한 감정적 반응을 논리적으로 해석하고 정당화하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감정이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다. 좋은 이미지를 가진 연예인들이나 유명인사들이 거액의 돈을 받고 광고를 찍고, 광고를 통해 소비자에게 구매를 촉구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우리의 이런 감정, 본능, 감각의 힘을 무시한다. 우리는 불안이나 스트레스 등 감정과 신체의 상태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객관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비관적으로 해석하게 되고, 그 해석이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에서 나온 것이니 '진실'이라고 믿게 되어, 내가 해석하는 ‘비관적인 나의 삶과 미래’로 인해 더 큰 절망과 좌절감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 감정 시스템과 신체 시스템은 더 불안정해지고, 우리의 해석은 더 감정에 치우친 비관적인 쪽으로 나가고, 그렇게 악순환이 시작된다.
이렇듯 인간은 우리가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하든 감정과 신체의 컨디션에 많이 좌우되는 존재인데, 이성만을 지나치게 중시하면 감정이나 본능, 감각의 힘을 억누르거나 무시하게 되고, 부작용들 (심리적인 고통과 어려움, 관계 문제, 식이장애 등)이 생기게 될 수 있다.
또 한 가지 예로, 섭식장애는 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문화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심리적 장애이다. 다이어트나 체형에 대한 이성적 통제가 본능적인 식습관을 억누르게 되고, 그로 인해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신생아일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본능적으로 건강하게 먹는 방법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섭식장애 치료에서도 이성을 통한 과도한 통제를 내려놓고, 감각과 본능을 존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상황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해석을 절대적으로 믿기보다, 그것이 단지 하나의 해석일 뿐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 오래 지속되며, 내 마음과 몸의 컨디션이 저조할 때 '내 인생은 망했어'라고 자동적으로 생각이 든다면, '내 인생은 진짜 망했어'라고 믿고 더 절망에 빠져 스트레스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이런 해석을 하고 있구나'라고 인지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절망감과 좌절감을 가뜩이나 힘든 상황에 더 더하지 않고, 이런 해석에 사로 잡혀 더 절망감에 빠지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된다.
인간관계에서도 '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고방식'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종종 상대방이 이성적으로 행동하기를 기대한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에게 더 많은 기대를 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로봇이 아니기 때문에 감정적이고 신체적인 상태에 따라 '내가 판단하기에' 비합리적인 행동을 보이거나,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다. 그럴 때는 상대방이 그런 행동과 말을 하는 이유가 감정적이거나 신체적인 요인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도움이 된다. 이렇게 상대방을 이해하면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더 원활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내가 상대방의 '비합리적인 행동/말'에 상처받고,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을 막을 수도 있게 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감각과 감정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과 조화를 이루는 연습을 해야 한다. 우선, 이성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더 의식적으로 감정과 신체적 반응의 힘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자신에게 타인에게 ‘이성적’이기를 비현실적으로 기대하지 않을 때 우리는 불필요한 저항과, 억압, 갈등을 줄일 수 있다. 또 수시로 우리의 감정과 신체적 반응에 귀를 기울이는 연습을 하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된다. 우리의 신체와 감정을 수시로 점검하게 되면, 이를 통해 현재의 상태를 제대로 인식하게 되고, 현실적으로 나에게 더 도움이 되는 행동을 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나의 이야기로 결론을 맺자면, 이번 한국 방문 동안 부모님의 갈등, 그 속에서 튀어나오는 내 안의 어린아이의 목소리, 이성적으로 내 어린아이 목소리를 없애버리려 하고, 부모님께 내 기준으로 '이성적'으로 행동하기를 기대하는 내 모습을 경험하며, 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의 부작용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금 인간의 감정, 본능의 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그 결과, 감정적 에너지를 절약하고 가족 간의 불필요한 갈등을 줄일 수 있었다. 남은 시간 동안 우리는 갈등 속에서도 사랑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따뜻한 순간들을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