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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자리 Sep 07. 2017

죄책감이 없는 아이들

책임지지 않는 어른. 아이들은 사회의 거울이다.


아이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자랑하듯 개인 SNS에 올리고

어차피 이리된 거 발뺌하면 지나간다고 웃고 떠드는 모습.

이 기회에 SNS 스타가 돼보자는 아이들의 태도.


다양한 아이들을 만나는 어른들조차 낯선 이 모습은

실상 몇 년 전부터 나를 당황시켰다.


학폭으로 온 아이들이 언제부턴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그닥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그로 인해 징계가 내려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서 미안하거나 잘못했다는 생각은 찾기 어려웠다.

그게 모 어떤가.  맘대로 하라는 식이었다.


대단히 무례한 말투,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행동

처음엔 부모가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해서라고

고전적으로 이해했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부모들은 어느샌가 변한 아이들의 태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엇을 놓친 걸까.

언제부터일까.


언제부턴가 그들은 어른을 신뢰하지 않는다.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스스로가 강하다고 보여주어야 한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없었다. 죄책감이라는 거. 공감한다는 것이.


우리는 놀이 중이었다.
일단 나름 재미있는 분위기에서 인형을 가지고 상황극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얘가 얘를 왜 때린 거야?
아이는 때린 아이에게 주목하고 있었다.
화나게 하잖아요 어린 게. 막 대들고 버릇없이 굴어요.

아... 그래서 화가 났구나. 그래서 때린구나.
그럼요. 말로 몇 번이나 얘기해도 소용없어요.
웬만하면 봐줄라고 했는데 맞아야 되는 거지 이런 건.

그랬구나. 그래서 이 맞은 아이는 어떻게 됐어?
사라졌어요. 울다가... 아마 집으로 갔겠죠?

울다가... 울었구나.
모 아파서 울았겠죠. 어쨌든 집으로 갔어요.

집에 가서 어떻게 했을 것 같아?
모 방에 있었겠죠. 몰라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보통 상황극을 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이 나오기 마련인데

때린 아이에게는 사정이 있었지만 맞은 아이의 사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맞은 아이의 상황은 그에게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정말로 그는 인지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집에 갔고 쫌 울었다고. 그게 다였다.


그와의 상담이 끝나고 뭔가 다르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떨칠 수 없었다.

나의 상황은 설명할 수 있었지만 상대의 상황은 그려내지 못했다.

그저 생각으로 이후를 유추했을 뿐이다. 모 아팠겠지. 이렇게...


상대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공감은 굉장히 자연스럽고 인간이 가진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상대방을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를 (단순히 기분이 나빠 공감하기 싫은 것이 아니다)

나는 종종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된다.  놀랍지 않을 정도로...


공감은 상호작용을 통해  배우는 감정이다.

누군가가 공감해준 경험이 있어야

공감을 받아 소통이 되고 나의 어려움이 해결되어 본 경험이 있어야 배우게 되는.

그들에게 공감이 없다. 자신의 끔찍한 범죄에도 죄책감이 없다는 건.

공감이나 죄책감의 필요성을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공감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자신과 타인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볼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한다.


실상 사회가 오랫동안 그러했다.

힘이 있다는 건 나라를 망쳐놓고도

 '돈도 실력이니 돈이 없는 너희 부모를 탓해라'라는

 명언(?)을 남길 수 있는 뻔뻔함을 뜻했다.

아주 오랫동안 분명히 큰 범죄를 저지른 이들은 비호를 받았고

피해자들은 조롱을 받아왔다.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고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죄의 대가를 받는 것은

약하고 힘없고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당하는 것이라는 걸

사회가 보여주고 있었다.


강한 자일수록 뻔뻔하고

강한 자일수록 오히려 범죄를 드러내고 자랑했다.

전두환의 회고록은 그 정점에 있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죄를 시인하지 않는다.

시인하면 덮어쓰고 패배자가 되고 낙오된다고 생각하고

부인하고 오히려 당당하게 변명하며 별일 아닌 것처럼 넘기면

힘 있는 아이들 뭔가 뒷배가 있는 사람들이라 여기기 시작한 건 아닌가.


아이들은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저 거울일 뿐이다. 우리의 모든 삶을

보고 듣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때때로 생각한다. 우리가 그렇게 경험으로 보여준 건 아닌가.

아무도 괴롭히지 못할만큼 강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슨 짓을 해도 당당하게 죄를 부인하고

오히려 내가 이런 짓도 할 수 있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걸.

죄책감이란 오히려 피해자들이 가지는 자기 연민 같은 거라고.


혹 우리가 보여주지 못해서는 아닌가.

잘못을 인정하고 나로 인해 아팠던 사람과 화해하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와 성찰을 필요로 하는

진정 강한 사람의 모습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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