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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의 정원이야기 Oct 24. 2016

#16그래도, 일본어 기업 출강은 즐거웠다

#나미래의 추억이야기_사람, 사람, 사람, 많은 말속에서

 
20대의 끝자락. 길었던 일본에서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얼마간은 직장 구하기가 신산했다. 말하기와 글쓰기, 탐방과 여행을 좋아하고 즐겼던 터라 오래전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던 끼를 드러내고 있었다. 삼류 잡지사도 좋았고, 기자라는 이름이 붙는 곳이라면 어떤 곳이든 개의치 않고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넣었다. 그렇지만 연락이 좀처럼 오지 않았다. 이제는 오도카니 앉아 기자만 되기 위한 바람을 꿈꾸고 있을 수는 없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일본어가 필요하다는 회사를 찾아 서너 시간씩 무연히 이력서만 넣고 있는 날이 허다했다. 무역회사 총무, 번·통역 아르바이트, 학원 새벽 강의는 직장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맺어진 나와 첫 사회 인연들이었다.

     

한 중소기업 무역회사 사장이 어딘가의 사이트에 날아다니는 내 이력서를 소개받고 직접 전화를 했다. 그 무역회사 사장이라는 남자는 지인을 통해 업종이 전혀 다른 곳에 넣어둔 나의 이력서를 건네받은 모양이다. 일본과 자동차 설비 거래를 하는 곳이라 소위 일본어가 좀 된다는 사람의 이력이 탐났던 것이다. 그 사장 남자의 말은 청산유수였다. 내가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하면 앞으로 내가 원하는 높은 연봉과도 타협이 쉽게 가능할 것 같았다. 이 회사에 출근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어떠한 미묘한 의리(?)를 심연에서 들끓게 하였다. 조금 더 회사의 물정을 따져봐야 했었다. 나는 그때 나이만 먹었지 사람들이 사람들을 모함하고 악용하는 심리를 잘 알지 못했다. 회사 생활은 순조로울 리가 없었다. 무너져 가는 회사의 모든 업무를 나 하나 보며 의지하고 있는 꼴이란.

     

직장에 정착되어 가는 느낌은 상활했으나, 일자리가 시원찮은 느낌에 학원 새벽 강의의 투잡 제안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새벽 학원 강의는 일찍 일어나는 몸의 부담에 비해 강의는 즐거웠다. 그 무렵, 새벽 강의를 나가게 됐다는 나의 말을 전해 들은 오랜 지인 한 명은 “강의하는 것 너무 멋있다. 나도 강의 같은 것 해보고도 싶었는데. 미래야. 그래도 나는 새벽에 일어나기는 죽어도 싫더라. 나는 새벽에 출근하는 직업은 싫더라고.’ 나에게 보내는 축하 인사인 것인지. 새벽에 일어나게 되어 힘들겠다는 위로의 말인지. 자기의 위치가 월등히 낫다는 표현을 에둘러하는 것인지. 꼭 무언가 소식을 전하면 ‘너는 그래도, 그렇지만, 나는 이래.’라는 그녀의 짐짐한 자랑 화법은 변화지 않았다. 나는 그녀와의 대화가 간략해지도록 애써 무질하고 있었다.


남을 가르치면서 내가 다시 공부를 하는 듯한 느낌이 좋았다. 수업 시간마다 학생들의 질문에 나의 영혼을 팔아 가듯이 설명을 하며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때론 학생들과 라뽀가 형성되면 그들의 생활 라이프를 듣고, 서로 고민을 주고받고, 한두 잔 술을 기울이는 날들도 이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학생들의 성장을 보며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던 때였다.

  

학원에서 어울리게 된 선생님들을 통해 기업 출강이라는 형태의 프리랜서로 강의 정보를 듣게 되었다. 새벽 시간에 강의가 주로 이루어지는 중소기업이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대기업의 경우 점심시간을 사이에 두고 회사가 서비스로 제공한 업무 시간을 이용하고 있었다. 대부분 3~6개월 단위로 이루어지는 강의 형태라 새벽 강의를 하고 잠깐 쉬거나, 오후 강의를 하기 위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 천직을 맞이한 듯싶었다. 기업 출강 강의는 내게 딱 맞는 직장이 아닐 수 없었다. 내 일에 태클을 거는 이도 거의 없었다. 문법만 지루하게 파고 있는 수업 방법을 회화 중심으로 바꿔보려 노력을 기울이던 때였다. 적어도 회화반이라면 문법 위주의 일방적인 교사 중심 수업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내가 지향하는 학습 방향이었다. 수업 시간에 문법을 설명하면서도, 어설픈 초급반에서도 일본어를 많이 사용하고 싶었다. 나의 일본어 수업의 방식에서는 많이 들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물론 나의 학습 방식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은 짐짓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같이 강의를 하러 다니는 같은 일본어 동료 선생님들 사이에서였다.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에서 강의를 받아 선생님들을 연결해 주는 중간 에이전트에서는 학생들에게 반응이 좋은 선생님을 놓치기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3~6개월 단위로 재계약을 하는 기업 출강 강의, 강사는 다시 말하면 파리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모 대기업 출강 강사로 나가 같은 회사에서 2년 넘게 재계약을 성공한 것을 보면, 분명 내 강의 방식이 많은 직장인들에게는 신선하게 다가왔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물러나야 할 시기가 있는 법이다. 5번째 계약에서 오래되었다는 것 외 나는 어떠한 정당한 이유를 듣지 못한 채 물러나야 했다.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고 얼마 후에 듣게 된 나에 대한 소문 이야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 함부로 사생활 얘기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봐요.”

     

에이전트 사무실 직원이 나에게 한 마디 충고를 덧붙인다. 같은 동료 선생님 중 한 분이 나에 대해 썩 유쾌하지 않았던 말을 한 모양이다. 즉, 일본에서 나의 아르바이트 생활에 대해 좋지 않게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사우나에서 근무하며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이 주요 요지였다. 그런 일이 무엇이었을까? 를 계속 추궁해 보니, 나는 한국식 사우나 안에서 때를 밀었던 때밀이 언니가 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때밀이를 했던 사람이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가당키나 하는 소리냐. 라며 민원을 걸어왔단다. 그렇게 불만을 토로하고 나에 대한 민원을 건 사람은 6개월 전까지 함께 일을 했던 동료 선생님이었다. 모 대기업 출강 강의에 재계약을 받지 못한 분풀이였을까? 시기 질투였을까? 그녀에 대한 어떤 생각도 하기 싫었지만, 마음만은 눙치지 말라 했다. 예쁜 아이를 출산하고도 미혼이라며 속여 가며 끝까지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학생들은 결혼한 유부녀를 싫어한다나.’하면서. 자기의 값을 자기가 떨어트리고 있는 것을 그녀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

  

일본어로 때를 ‘아카스리’라 하는데, 일본 동경 지역에는 생각보다 때를 미는 한국식 사우나가 많았다. 한국인은 물론이요, 일본인도 사랑하는 목욕 방법 중 하나였다. 우리도 알지 않은가? 때를 밀고 나면 얼마나 시원하고 개운 한 지에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다. 나는 일본에서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되어 줄곧 사우나 카운터에서 아르바이트를 다. 예약을 받고, 밤새 편히 쉬기 위해 숙소 겸 사우나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서비스로 웃는 얼굴을 보이며 식사와 음료를 제공했다. 내가 때밀이를 했다는 오해를 샀던 것이 억울했다기보다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째로 비굴하게 만들었던 한 마디에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또한 지독히도 열심히 일하며 학교를 다녔고, 일본 생활을 했던 많은 우리들이 설핏 비치기도 했다. ‘때밀이를 했던 사람이 일본어를 가르친다.’는 그녀의 해석이 던적스러워 보였다. 설령 때를 밀었으면 어떤가. 그것이 부끄럽고 창피하였다면 계속 숨기고 말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녀는 분명 자기가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하는 류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그녀는 사람을 가르칠 자격은 없어 보였다.

     

이간질의 끝은 자기에게 피해가 돌아간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녀가 뱉어낸 입말의 경솔함은 나의 다음 계약에 큰 영향력을 미쳤지만, 나는 이 말은 꼭 남기고 싶었다. 이후 어떤 사람을 만나도 깊이 있는 나의 사생활은 조금 덮게 되었지만, 일본어 출강만큼은 최고의 직업이 되어주었고, 자유롭고 즐겁게 강의를 했던 곳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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