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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의 정원이야기 Dec 19. 2019

(소설) #1. 끝나지 않을 두 번째 장례식

나미래의 소설! 문학반에서 글을 배울 때 신춘문예 접수해본 생애 첫 소설

[이 소설은 문학반에 다니며 썼던 글입니다. 몇 해 전, 모 신문사에 응모를 해본 경험이 있는 제 첫 단편 소설입니다. 수상에 감히 오르지는 못했지만, 그대로 묵혀두는 글이 안쓰러워 이렇게 빛을 쬐어주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저작권은 제게 있으니 무단 사용은 양해를 바랍니다. ]


#끝나지_않을_두_번째_장례식, #나미래


  장석재, 본인상, 하늘장례식장 구름실.

  대학 동문회의 SNS 밴드에서 그의 죽음을 읽었다. 내가 읽고 있는 글자가 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그의 이름이 과연 그가 맞는지에 대하여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봄비가 내리는 아침이었다. 누군가의 장난이었다면 전화를 해서라도 호통이라도 치련만. 석재의 발인 날짜를 확인하고 함께 시간이 되는 동문들끼리 연락이 빠르게 오가는 중이었다. 그의 본가 근처에 위치한 포항의 하늘장례식장에서 만나자는 댓글들 속에서도 나는 장석재가 나타나 이 모든 것들이 거짓말이라는 글을 올려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동문들의 반응은 ‘삼가 고인(故人) 명복을 빕니다.’라는 상투적인 문장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개의 댓글들은 그 인사의 문장 앞에 ‘세상에…….’의 짧은 표현을 붙여 황망함이 섞인 모든 음울한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는 듯했다. 많은 이들은 형식일지라도 죽은 자를 위한 예우의 문장들을 정성스레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적을 수가 없었다. 석재에게 남은 많은 유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석재는 17년 전쯤, 일본 동경에서 나와 같은 대학을 다녔고, 같은 해에 졸업한 동창이자 동문이며, 졸업 후에는 6개월 정도 함께 지냈던 한 살 어린 연하의 남자 친구였다. 그리고 올해 중학교를 졸업한 아이의 아빠이기도 한 그 남자. 그가 지금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지인들을 통해서도 일절 들은 바가 없었다. 요원해진 석재를 조용히 몇 번 찾아보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망연스럽게도 동문회 밴드 공지에 올라온 부고 소식이 그가 내게서 또 사라진 그날 이후 첫 소식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장석재가 죽었단다.


  석재는 내가 일본에 들어갔던 해보다 일 년 정도 먼저 동경 근교에 들어와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나와 함께 같은 해에 지유 대학을 졸업하면서 매년 갱신하던 그의 학생비자는 자연스럽게 만료되었다. 일본 출입국관리사무국으로부터 귀국 준비 기간을 6개월 정도 더 받고 9년여의 유학생활을 정리했다. 나보다 십 개 월 정도 먼저 귀국길에 올랐다. 그가 한국에서 직장을 찾아다닐 때, 나는 일본에 남아 호서대학 교육대학원에서 연구생 일 년 과정을 마무리하고 있던 참이었다. 결혼을 위해, 그를 따라 함께 귀국길에 오르는 것이 맞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물론 그도 내 마음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학교를 제대로 마무리하고 올 것을 권유했었고 꿈에 그리던 미국과 캐나다 여행까지 다녀오라는 다정한 말도 남겨주었다. 먼저 자리 잡고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을 수없이 했기에 ‘나는 역시 행운아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는 각자의 사정이라 연락이 뜸해져도 달려갈 수 없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이별의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을 느낀 나는 짐짐했다.


  한국에서 보험 회사에 취직을 한 석재는 가끔 ‘잘 지내고 있느냐.’등의 안부를 묻는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직장에 취직하면서는 돈이 떨어지면 언제든지 연락해. 돈 붙여 줄 테니까. 여행 중이라도 돈 없으면 말해. 인천공항에 도착하면 늦은 저녁이나 새벽이여도 마중 나갈게. 얼른 같이 살자.라고 했던 그의 말은 어느새 지키지 않을 세기의 약속으로 남겨지고 있는 듯했다. 점점 연락이 뜸해지고 좀처럼 전화 연결도 쉽지 않았다. 이 남자에게 찬바람이 끼쳐 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와 오래가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2주 동안 캐나다와 미국 동부 지역 여행을 마치고 인천공항을 통해 새벽에 한국으로 도착했을 때였다. 혹여 하는 마음으로 여행을 마무리하기 4일 전쯤 출발 비행 편명과 한국에 도착하는 비행시간을 적어 보냈는데 이메일에 대한 답장이 없었다. 석재 그 자식은 결국 공항에 마중을 나온다는 약속을 끝까지 지키지 않았다. 그가 마중 나오지 않을 것을 조금은 예상했는데도 친구 한 명 부르지 않은 것을 조금 후회했다.


  유일하게 공항에서 나를 반갑게 맞이해 준 것은 긴 여행에 지쳐 화물칸에서 찌그러져 망가진 대형 여행가방 뿐이었다.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에 공항에서 서너 시간 정도 무연히 그를 기다렸다. ‘차가 막혀 조금 늦어질 수도 있을 거야. 기다려 볼까.’하며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입국장 주변을 몇 번이나 선회하면서 ‘이메일을 보지 않았을 수도 있어!’라는 가벼운 믿음도 함께 했다. 그리고 고장 난 가방에 대한 해당 항공사에 책임을 묻기 위함이라는 단서도 기다림에 붙여놓고 있었다. 새벽 5시 경에 도착해 항공사 사무실 근무 시간이 시작되는 9시까지 기다리는 것은 외로움과 비굴함을 더 증폭시키는 일이었다. 그날 공항에 나오지 않은 옛 애인에 대한 울울함과 유감스러움에 고장이 나버린 가방에 대한 위로금을 요구하는 나의 목소리는 더 크게 상기되어 있었다.


  석재를 다시 만난 것은 그가 귀국을 하고 헤어진 지 일 년 정도가 되어갈 무렵이었다. 나는 일본에서 오랜 유학생활을 경력으로 인정받아 귀국하자마자 J항공사에서 내근직으로 취직할 수 있었다. 인천 부평에서 아침마다 출근을 하는 것이 조금 벅차 공항 근처로 이사를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찬바람이 불던 늦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찬바람을 밀치며 틀에 박혀 출근을 하는 특별함이 없는 날이었다. 한국으로 귀국 후 반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공항 지하철 안이 그날은 더 많은 승객으로 북적대고 있었다. 금요일이어서 그런지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하는 여행객들이 많아 보였다. 운 좋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항상 가방 안에 넣어 다니는 그날의 책을 꺼내 조용히 읽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의 시선이 나에게 쏠린 것 같은 불편함에 설핏 고개를 올렸다. 거짓말처럼 그가 내 앞에 바투 서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얼굴을 다시 올렸다. 석재? 석재니? 맞지? 마냥 기뻐할 수 없는 놀람으로 나는 그의 이름만 불러댔다. 놀라 당황하는 나를 보고도 그는 슬몃슬몃 웃고 있을 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를 향해 뺨 한 대 날리고 싶었지만, 차마 손을 올리지 못했다. 출근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인 공간이라 가벼운 인사로 대신하며 그를 먼저 보내야 했다.


  이후 내 번호를 어디에선가 알아내고 몇 번의 전화를 했지만 그의 만남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내가 자기 월급 줄 수 있는데, 지금 얼마 받아? 나한테 오지 않을래?’ 형식적인 작업 멘트인 것인지? 다시 사귀자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석재의 핸드폰 문자 한 통을 받았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실패의 경험담은 주변 사람들에게 무수히 많이 들었다.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이 남자의 말을 들어보고 싶었다. 여행 중에 보낸 이메일에 대한 답장은 왜 없었는지? 왜 중간중간 연락은 되지 않았는지? 공항에는 왜 나오지 않았는지? 결혼하자는 말은 아직도 유효한 것인지? 누구를 사귄 것은 아닌지? 에 대한 질문들을 머릿속 목록에 가득 넣어두고 있었다. 사실 길쭉한 키에 시원하고 훤칠하게 잘생긴 이목구비를 한 번 더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물론 그의 몸도. 그의 감언이설도 좋았다. 한 번 또 속아 넘어갈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계속되는 그의 연락에 만남이 이루어진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저녁식사 약속을 잡았다. 나는 그가 원하던 장소를 선택하도록 먼저 배려해 주었다. 인천공항 청사만 돌아다니는 나에 비해 직장에서 손님 접대를 많이 한 그에게 장소 선택을 양보하고 싶었다. 아니다 적어도 그에게 근사한 밥 한 끼 정도는 얻어먹자는 생각이었다. 맑은 국물과 따뜻하고 매콤한 한식을 좋아했던 그는 사당역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나는 그의 식성을 여전히 잘 기억하고 있었다. 할 말이 너무 많았지만, 적어도 헤어져 있는 동안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았던 자존심을 한순간에 내보이기 싫었다. 여자 생겼어?라고 묻는 내 말에 석재는 적잖이 당황한 눈빛이었다. 내가 무슨 여자야. 직장 다니기 바빴다. 근데 최근에 직장 그만뒀어. 공항에 마중 못 나간 것도 실직하고 얼마 안 되어서 볼 면목이 없더라고. 처음 들어간 보험 회사는 내 돈이 더 들어가더라. 실직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우연히 공항철도에서 만난 그때가 궁금했다. 실직했다면서 그때 지하철 안에서 나를 만날 땐 짐 가방 하나를 들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어디 가는 중이었어? 나는 궁금한 게 많았다. 일본에 잠깐 다니러 갔어. 그때 거기서 너랑 지낼 때 선배랑 사업했잖아. 마무리 덜 된 것도 있고 돈도 받을 게 좀 남아 있기도 해서. 돈은 잘 빌려주지 않고, 빌려준 돈은 꼭 받는 것으로 유명한 그가 돈을 받지 못하고 귀국을 했단 말에 나는 의아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선배와 함께 사업을 하던 때도 있었다. 한국에 바로 들어가는 것이 싫어 일본에서 사업으로 눌러 있고 싶은 바람을 비추기도 했었다. 귀국 만료 비자 날짜는 다가오고 비디오 가게를 하면서 잘 풀리지 않아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게 됐지만 말이다. 돈에서 만큼은 철저하게 꼼꼼하고 절약했던 그였다. 내가 그의 여자 친구이긴 친구였을까? 아님 또 돈을 받기 위해 어떤 여자를 만나러 가는 것일까? 나는 의심의 끈을 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함께 지냈던 동거 기간에도 그는 돈 한 푼을 쓰지 않았다. 정해져 있는 방값에 생활비는 많이 나가지 않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자잘하게 돈이 들어가는 것은 액수를 따지지 않고 가볍게 썼던 탓에 그에게 기대하지 않고 내가 지불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후로 식사 만남에 이어 주말을 이용해 시간이 될 때는 드라이브를 하기도 했다. 돈이 아까워 일본에서는 잠깐 여행이나 1박의 호텔 숙박도 허락하지 않았던 그가 한국에서는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만날 때마다 실업자가 된 그가 돈을 다 지불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직장을 다니고 있는 내가 조금은 미안해서 결제를 할 때도 종종 있었다. 내정된 직장이 있다는 말을 전한 것으로 봐선 곧 다시 직장에 나간다는 말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문자에 대한 답장과 통화를 하며 칼 같이 날카롭게 쳐내지 못한 관계는 다시 연인처럼 우리를 엮어주고 있었다. 차창 안으로 달려올 것 같은 창창울울한 강원도의 깊은 산속에 차를 정차시키고, 손을 잡고 걸으며 희희낙락 거리기도해봤다. 서해안의 바닷가를 돌며 거친 바다의 숨소리를 품에 안기도 했다. 어쩜 다시 익숙한 몸을 만나고 싶어 쉽게 뿌리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우리는 겨울이 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몸을 너무나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석재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참 좋았다. 거침없이 그의 몸을 갈망하고 있었지만 지난날에 대한 어떠한 불만에 대해서도 그에게 뱉지 않았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결혼의 약속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엉성한 믿음은 나에게 강한 인생 지침을 만들어준 셈이다. 그리고 자신이 결혼 전에 한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이었는지 알려 주지 않은 채 또다시 그렇게 연락이 조금씩 뜸해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만나는 연인들의 성스러운 약속으로 그를 유인해 보았지만 그는 좀처럼 약속 장소에 나타나질 않았다. 맑았던 오후의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듯 음울한 검은 구름이 끼어 있었다. 나는 석재의 전화번호를 내 핸드폰 저장 목록에서 가뭇없이 꺼내버렸다.


  그가 떠나고 마음을 잡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결코 그에 대해선 단단하지 않은 가벼운 신뢰와 믿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별이 조금 일찍 온 것에 대해 아쉬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를 내 안에서 온전히 내려놓기 위해 나는 누군가의 말벗과 충고가 필요했다. 그 무렵, 엄마는 내켜하지 않는 나를 데리고 사주점을 보러 나섰다. 엄마가 알고 있는 지인의 친구를 몇 번이나 건너 알아낸 강 선생님이라는 분이 운영하는 동양철학관이라는 곳이었다. 뻔하고 흔한 이야기가 오갔다. 요약해 보면, 계속 연필을 잡고 책을 보게 될 팔자라는 것과 노년이 궁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는 혹시 딸에게 나쁜 일이나 닥치지 않을까? ‘좋은 얘기 좀 해 주세요.’라는 간절하고 근심어린 눈빛을 작은 탁상 앞에 앉아 있는 강 선생님에게 보내고 있었다. 엄마는 내 입에서 꺼내지 못한 석재의 인연을 한 번 그 선생님에게 더 확인하고 있었다. 석재의 사주를 풀어내던 강 선생님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결혼한다는 여자가 9명이나 있어. 자네하고도 결혼하려면 진작 했을 법도 하구먼. 사귄 지 5년이 넘었다면서 지금까지 안 한 것도 인연이 아니야. 잊어. 자네도 그냥 그 많은 여자들 중 하나일 뿐이야. 전생에 기생 팔자였네. 사주가 딱. 잊어! 얼마 가지 않아 자네에게 좋은 남자 운이 있어. 귀에 쏙쏙 박힌 사주풀이였다. 좋은 남자 운이 있다는 말에 피식 속으로 웃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나저나 나는 그에게 몇 번째 여자였을까?


  대학 동문회장인 재영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은 밴드에 석재의 사망 소식을 본인이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소원아 같이 가자! 그래도 석재 명복은 빌고 와야지. 네가 보내주면 좋아할 텐데……. 저기 말이야 준우도 함께 데려가자!”라고. 나와 같은 과 동기였으며, 15년 동안 동문회장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고 독재를 지키고 있는 재영이는 석재의 연락처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5년 전에 이혼한 재영이는 나와는 나이가 같았고, 석재보다 한 살이 위였다. 허나 우리들은 석재가 빠른 71년생이어서 같은 학년으로 학교를 함께 다녔다는 이유로 서로 이름을 부르고 친구처럼 지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분명했다. 재영이는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보다 어른스러워졌고 말주변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는 동문회 모임에 늘 앞장서왔다. 재학생 때부터도 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회장 역할이 끝날 때에는 다른 임원진들을 도와 많은 일을 도맡아 했고, 긍정적이고 오지랖이 넓은 성격 좋은 사내였다. 다행히 누구와도 적을 두지 않아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석재의 결혼 소식을 내게 전해 준 것도 동문회장 재영이었다. 우리의 동거생활도 동문 중에 유일하게 알고 있었던 그였다. 놀라지 마라.라고 뜸을 들이며 시작한 석재의 결혼 소식은 입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쿨’하게 받아 들었다. 계산해보니 내가 석재와 우연히 만나 몇 번을 더 만나고 헤어지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다시 말해 그는 나와 몇 번의 잠자리를 하고 사라진 뒤 세 달이 채 되기도 전에 결혼식을 올렸던 것이다. ‘개새끼! 나쁜 새끼! 말도 없이 조용히 사라져서 결혼식을 하냐. 내가 너를 잡아먹기나 해. 결혼식을 올린다고 왜 말 못 해. 전화기 꺼놓고 연락 안 되게 하는 그런 상습적인 짓을 아직까지 하고 있냐.’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재영이 앞에서 하마터면 큰소리로 팩팩거릴 뻔했다. 입 속에선 거친 말들을 여러 준비했지만 미세하게 흔들거리는 술잔의 파도만 감추려 애를 쓰던 나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애써 눙치고 있는 그런 나의 표정을 재영이는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후 석재에 대한 어떠한 소식도 내게 전달되지 않았다. 나는 재영에게 일부러 석재에 대해 묻지 않았지만, 언제부턴가는 석재와 재영이가 서로 전혀 연락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정도는 눈치로도 알 수 있었다. 석재는 자주는 아니었지만, 잊힐만하면 생각나도록 나와 아이의 안부를 묻는 전화나 문자를 넣어주곤 했다. 가끔 인터넷 검색 창에 요원해진 장석재의 이름을 써보고 검색해 보았지만 그는 SNS의 어느 세상에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나한테 오지 않을래.’ 그의 문자에 대한 미련이 남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혹시 다른 급한 일이 생겨 나에게 연락을 취할 수 없었던 상황은 아니었는지.’ 에이 아니야. 됐어!라고 천만번 마음을 다 잡았다. 나를 떠났던 남자, 그다음 해에 태어난 아이가 16살이 되도록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석재. 그가 다른 곳에서 이루고 있었던 가족들의 모습이 궁금하던 참이었다.


  석재의 장례식장에는 아들이 함께했다. 아이에게 아빠의 장례식장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리기까지 망설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들과 나는 매년 봄이 오는 길목을 따라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7번 국도로 갈아타 남으로 여행을 하곤 했다. 이 길이 참 익숙했다. 동해안의 푸른 바다 수평선을 따라 유명 해수욕장을 지나고 관광단지를 지나게 되어 있는 7번 국도는 아들과 내가 좋아하는 여행지 중 한 곳이기도 했지만 유독 아들이 좋아하는 곳이기도 했다. 아들은 차창에 기대 아빠의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해안도로를 줄곧 바라보고 있었다. 길게 뻗은 바다 근처의 냄새를 무연히 맡고 있는 듯했다. 태어나서 두 살이 채 되지 않아 이혼한 것으로 알린 엄마에게 아빠에 대한 어떠한 질문도 잘하지 않았다. 성장을 해 가면서 엄마를 배려하는 아들의 마음이 느껴질 때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아빠의 모습을 이야기해 주었다. 명절이 다가올 때는 서해안 대부도 근처로 아빠의 고향을 말해 주었고 예전에 한 번 만났던 그의 어머니에 대한 모습과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아빠에 사망 소식을 전해 들은 아들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들에게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아비가 있는 자리에서 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회사 동료들도 내가 직장에 들어오기 전에 결혼식을 하고, 남편과 2년이 채 되기 전에 이혼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동문들에게도 마찬가지 거짓말을 했다. 결혼식에 부르지 않았던 원망의 소리를 종종 들어야 했고 이혼했다는 소식을 전할 때는 뭐 그럴 수도 있지.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회사 동료들이나 학교 동창들 중에서도 친하게 지냈던 이들은 아이를 데리고 모임이나 식사 자리에 나갈 때마다 아빠 없이 외롭게 자란 아들에게 살뜰하게 알은체를 해주고 용돈을 쥐어주기도 했다.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 있거나, 멀리 있지만 시간에 자유로운 동문들이 여럿 모였다. 석재는 비명횡사에 가까운 죽음이었다. 사진 동호회 동료들과 떠난 2박 3일의 출사 여행의 숙소는 서해안 해안도를 따라 넓게 펼쳐진 무설대해수욕장 근처였다. 거하게 술을 마시고 술이 조금 깬 다음, 찬바람을 쐬기 위해 갯벌과 낮게 맞닿은 방파제에 차를 끌고 나간 것이 화근이었다. 밀물이 밀어닥치는 시간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파도에 덮친 사고였다. 그는 늘씬하게 허리를 드러낸 서해안 썰물의 방파제 길 위로 차를 세웠다. 잠깐의 휴식이라고 청했던 잠은 긴 잠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밀물이 되어 들어오는 새벽녘 바다의 계단은 점점 차 안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화들짝 놀라 문을 열어젖혀 밖으로 빠져나간 그는 파도의 움직임에 힘을 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파도의 움직임은 그를 놓아주지 않고 먼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타살과 자살의 의심이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석재의 가족들은 부검까지 이미 마친 상태였다.


  검정 상복을 차려입고 있는 그의 아내인 듯한 중년의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예쁘장한 얼굴이었지만, 통통하게 오른 살 때문에 그 미모가 가려져 있었다. 흘러내리지 않게 묶은 웨이브 머리의 그녀는 40대 초반 정도를 가늠하게 만들었다. 그의 아내 옆에 중학생쯤 되어 보임직한 상주 완장을 찬 여자 아이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석재의 딸인 듯했다. 날카롭진 않지만, 오뚝한 코하며 작은 얼굴, 쌍꺼풀이 연하게 잡힌 눈매는 석재를 꼭 닮아 있었다. 몇 살이나 되었을까? 궁금했다. 이미 고개를 숙여 문상객들과 인사를 나누었지만, 대학교 유학생 동문이라는 말을 전해 듣고 그녀는 딸을 불러와 다시 인사를 시켰다. 석재의 외동딸은 우리 일행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친척들에게 시선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갔다. 다가오는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진한 모습으로 어린 손녀를 꼭 껴안은 낯이 익은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들어왔다.


  졸업 전인 대학 4학년 때로 기억한다. 귀국 날짜를 함께 맞추고 나와 한국에서 시간을 보냈던 그는 나를 자기 어머니에게 데려가 소개를 시킨 적이 있었다. 영덕버스터미널에 도착하자 그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작은 옷가게로 나를 데리고 갔었다. 유일한 남매였던 그의 누나가 함께 돕고 있었던 그 가게에서 가볍게 인사를 하고 몇 마디 질문에 답변을 한 정도였다. 여자 친구라는 표현도 없었고, 애인이라는 단어도 나오지 않은 학교 동창으로 소개를 하는 그가 조금 야속했지만, 반갑게 맞아주었던 그 고운 피부 색깔과 작은 얼굴에 선한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주름은 하얀 피부 위에서 더욱 물결을 치고 있었고, 머리는 검은 염색으로 백발이 되어 가는 것을 가리고 있었다.


  아들은 할머니나 주변 친척들에게 인사를 드려도 되냐는 질문을 내게 했다. 함께 차를 타고 오면서 아들은 많지 않았던 말을 한번 이어갔다. 정중하게 인사를 드려라.라는 나의 말에 아들은 무언가 안심하는 눈빛이었다. 우리 일행은 함께 다가가 고인이 된 석재의 어머님께, 어쩌면 시어머니가 되었을 수도 있는 나의 어머니께, 그리고 지금은 아이의 할머니가 되는 분께 애도의 인사를 올렸다. 인사를 함께 하고 빠져나올 때 아들은 할머니에게 다가가 낮게 고개를 숙이며 다시 인사를 올리는 것이었다. 할머니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김준우라고 합니다. 인사는 짧았다. 석재의 어머니는 아이의 인사말 뒤에 이름을 듣지 못했는지 누구라고요? 몇 번 묻고는 아들을 찬찬히 올려다보는 것 같았다. 아이와 나를 번갈아 보며 낯이 많이 익네요.라고 한마디를 던져주었다. 설핏 고개를 돌려 우리를 다시 보았지만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아이도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아들의 인사에 나도 조금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른스럽게 본인의 이름까지 밝히며 말하는 아이가 낯설었다. 언제였나? 아들이 중학교에 들어갈 즈음이었던 것 같다. 아들이 태어나고 나의 성을 따라 이가 성의 이름을 지었다. 복잡해지는 것도 싫었고 특히나 같은 성을 가진 부부들도 많았기에. 엄마, 이 씨보다는 장 씨나 강 씨도 제 이름과 어울리지 않나요?라고 물었던 때를 기억하게 했다.


  “딸아이와 저도 남편의 죽음 때문에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걸요.”석재의 아내는 2년 전부터 시댁과의 갈등, 그리고 남편과의 관계에서 골이 깊어져 별거를 시작했다는 말을 어렵지 않게 꺼내놓았다. 아이가 성인이 되면 편하게 만나리라는 생각에 홀로 지내고 있다고 했다. 딸아이는 올해 중학교를 졸업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궁금하던 차에 묻지도 않은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어느 정도 마음을 비우고 장례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뭐야. 우리 아들과 별 차이가 없잖아! 나쁜 자식, 결혼 직전에 나에게까지 문어발을 치며 깔끔하지 못하게 말이야.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도 우리 아이가 조금 더 일찍 태어난 오빠였으면 하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별거를 하면서도 남편의 상을 치르러 와 있는 모습에서 그녀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이 분도 석재의 사주에 나왔던 그 9명의 여자 중 한 명이었나? 그와 관련된 여자라면, 그와 관련된 사건이라면 사주 철학관 강 선생님의 말에 나왔던 그 9명의 여자가 불현듯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석재의 기억에 휘말려갔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일본의 신주쿠(新宿)에서 타니쿠라(谷倉)라는 곳으로 거처를 옮긴 1995년 삼월의 어느 이른 봄날이었다. 아직 쿨렁거리는 찬바람과 얼어붙은 땅의 기운이 사그라지지 않아 입학식의 기쁨도 잠시 접어두고 있었다. 4월에 학기가 시작되는 일본에서는 관동지역을 중심으로 벚꽃나무들은 신입생들에게 최고의 꽃잔치를 벌여준다. 석재는 신입생으로서 같은 학교에 입학하는 학년 동기였다. 학교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유학생 우선으로 마련해 준 기숙사로 거처를 옮긴 것은 한국, 중국, 대만 유학생 중 10명 정도뿐이었다. 비싼 방값을 지불하고 사는 일본의 일반 숙소에서 3만 엔 정도의 기숙사로 들어오게 된 유학생들은 4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행운아들이었다. 학교 캠퍼스가 있는 시골 지역으로 숙소를 옮겼지만 다들 동경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계속하고 있었다. 기숙사로 내정된 유학생들은 학교가 시작되기 4월 전에 짐 정리를 끝냈고, 학기가 시작되지 않은 기간에는 여전히 한 시간 반 이상을 전철로 다녀야 하는 곳에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석재와 나도 그중에 한 사람들이었다.


  타 니쿠라 구청에 근무하는 마끼 씨가 석재의 숙소에서 나온 것을 본 것은 밤을 새는 저녁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온 토요일 아침이었다. 타니쿠라구청은 우리 숙소에서 거어서 5분 거리에 있었다. 물론 그녀의 집은 그렇게 가깝지는 않았지만 차로 금방이면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고 나도 언젠가 들은 기억이 있다. 마끼 씨는 차에 올라타 창문을 내리고 그와 조용조용히 무슨 말을 주고받은 듯했다. ‘다음에 다시 전화하겠다는 말이었겠지. 역시 일본 여자들은 앙큼하네. 벌써 한국인 남자 집에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니.’라며 그녀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혼잣말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키 씨가 차에 시동을 걸고 서서히 출발을 하자 그는 그녀의 차가 향하는 방향으로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그와 제대로 인사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는 기숙사 계단을 오르며 나와 눈이 마주치자 가벼운 목례와 함께 눈인사를 건네주었다. 차를 타기 전 마키 씨는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돌려 계단을 내려갔지만 그녀가 타니쿠라구청에 근무하는 마키 씨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 그 해당 지역의 구청을 찾아가 밟아야 할 수속이 만만치 않았다. 그곳에서 외국인들의 손과 발이 되어 주었던 사람이 바로 마키 씨였다. 조금은 능숙하지 못한 일본어를 구사해도 금방 알아차리고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는 친절한 젊은 아가씨였다. 캠퍼스가 있는 농촌 지역의 타니쿠라 사람들은 동경 쪽 사람들과는 다르게 정문화가 발달되어 있었다. 그중에 한 사람이 마키 씨였다. 외국인 거주를 전담하는 부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또한 젊고 푸릇한 학생들이 이 지역에서 거주하게 된 것도 지역 주민들에게 주목받을 만한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일이 끝나는 평일이면 석재의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을 골라 드라이브를 나갔고, 자주 그의 집에 머무르며 은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구청에 근무하는 마키 씨와 사귀시는 거예요?”라고 학교가 끝난 귀가 길에 석재에게 물었다. 벚꽃나무에서 꽃들이 뭉실뭉실 만개하고 농염한 자태를 보이기 시작한 4월 초였다. 타니쿠라의 벚꽃은 일제히 웃음을 터트리는가 하면 어느새 꽃잎은 처연히 떨어져 바람에 뒹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던 날은, 유학생 모두 이름을 주고받고 어느 정도 안면을 익힌 상태였다. 아직 기숙사에서도 누구와 친해지지 못한 나는 집까지 20분 정도 거리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와 옆에서 나와 함께 발을 맞춰주며 인사를 하는 석재에게 처음 건넨 질문에 그는 조금은 당황하는 눈치였다. ‘아니요.’라는 답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오래 만나오지 않은 사이에 남의 연애 사정에 대해 먼저 묻는 것이 조금은 민망했다. 그렇지만, 왜 석재를 만나자마자 그런 질문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나도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학교가 시작되고 집으로 돌아오던 첫날의 엉뚱한 질문은 오히려 석재와 나를 편안하게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되어주었다. 빠른 71년 생으로 나와 같은 해에 학교를 다녔고 나이도 엇비슷해서 우리는 금방 친구가 되었다. 또한 조금씩 손으로 몸을 터치를 하며 웃어줄 줄 아는 사이가 되어갔다. 그리고 학교가 끝나면 기숙사에 있는 한국인 유학생들과 함께 우르르 몰려 한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도 했다. 자주 각자의 집을 넘나들며 맥주 한 잔씩 들이키는 시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때부터 맥주가 좋아졌다.


  하교 길에 학교 정문에서 석재를 늘 기다리고 있는 일본인의 아키 씨는 어리고 예뻤다. 순수한 감정을 토해내고 가지런하고 앙증맞게 써 내려간 엽서와 편지를 우편으로 계속 숙소에 보내왔던 그녀의 감성에 놀라 혼이 빠지기도 했다. 석재를 향해 내보이던 애틋한 눈빛과 몸짓은 그와 한마디라도 더 하기 위해 늘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간혹 그녀의 애정 공세에 질투를 느끼기도 했다. 일본인인 아키 씨에게 나하고의 관계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 것에 그를 사이에 두고 울분을 토하며 서운해하기도 했다.


  석재 씨가 이상하다며, 내게서 떠나가는 그가 싫다며, 나는 그를 너무 사랑한다고 나에게 전화를 걸어 어눌한 일본어로 고백했던 대만의 루이 씨.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석재에게는 차마 대만인인 루이 씨의 고백을 내 입으로 전달할 수 없었다. 눈이 소복이 쌓인 추운 겨울 타니쿠라의 마루 숙소는 추위에 더욱 노출되고 있었다. 숙소 앞에 세워져 있던 석재의 오토바이가 어디를 나갈만한 날씨가 아니었는데 그를 찾고 싶은 마음이 발동했던 것은 왜였을까. 근처를 돌아다니다 보니 대만 동창인 루이 씨 집 앞에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여자들을 빨아들이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석재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맥주를 샀다. 그의 짧은 인생을 위로하며 맥주를 몇 잔 다시 나누고 싶어 졌다. 향이 피워져 있는 그의 영정 아래 단 앞에는 그가 싫어했던 소주가 가득 놓여있었다. ‘맥주를 참 좋아했는데…….’ 혼잣말을 뱉었다. 혼잣말을 할 때는 늘 귀가 쫑긋 되어 엄마 방금 뭐라 그랬어요? 반드시 확인을 하고 넘어가는 말 습관이 입에 배어 있는 아들이었다. 아이를 혼자 키우며 늘 혼잣말로 넋두리를 하고 있는 엄마에 대한 위로였다면 위로였을 것이다. 아니야. 아무 말도 아니었는데. 거짓말 방금 누가 맥주 좋아한다면서요. 엄마를 향해 아들은 조금 집요해지려고 한다. 엄마도 맥주 좋아하잖아요. 마셔요! 아빠도 맥주 좋아하셨죠? 아이가 묻는다. 계속해서 아이는 마음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 한다. 엄마 아까 장례식에서 할머니가 많이 울고 있는 것이 안쓰럽더라고요.라고도 했다. 아이와 나를 번갈아 몇 번 보시던 석재의 어머님. 그 분과 인연이 닿았다면 그 집안의 장손이 되었을 아이다. 내 옆에서 나를 든든히 지켜주는 아이. 아이 앞에서 맥주나 다른 술을 많이 마셔본 적이 없었는데, 그리고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아이가 내 배속에 자리 잡았던 3개월 정도는 전혀 임신의 증상으로 자각하지 못하고 직장을 나가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가 다시 조용히 떠나버린 한 달 후, 임신 3개월이 지나 안정권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초음파 검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인천공항 J항공사 사무실 근무는 사생활이 많이 보장받고 있었다. 직장 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나고 돌잔치를 하지 않는 것에 조금은 아쉬워하기도 했다.


  엄마는 임신 소식을 듣고 의외로 뱃속의 생명을 기쁘게 받아주었다. 딸이 양쪽 집안 어디에서도 환대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인지 엄마는 나를 안아주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자궁이 약했던 엄마는 작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게 틀림없었다. 출산 후에도 직장에 나갈 수 있도록 아이의 육아를 전담해 준 엄마 덕분에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상황들도 나를 비켜가고 있었다. 아빠가 없는 공간에서, 남편이 없는 방에서, 사위가 없는 집에서, 싱글맘이 되어간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


  밤새 술은 멈춰지지 않을 것 같다. 한 번도 자신의 아이를 만나지 못하고 가버린 그에 대한 황망함의 넋두리를 표현하고 싶었을까.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게 관심을 끄고 살았던 휑뎅그렁한 지난날의 후회가 없었다고 말 못 하겠다. 하지만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 주변에 나타나 어떠한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아니더라도 몇 명 더 남은 여자 때문에, 다른 무엇 때문에 마음마저 고생하고 있었을 석재와 결혼한 그의 아내. 그녀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였다면 배려였다. 지금 흐르는 눈물은 고인에 대한 예우라고, 우리가 함께 한 시간에 대한 애도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준우야, 이제 너도 알아야지. 그것이 지금이 될 줄은 몰랐지만 너도 언젠가는 알 일이잖아…….


  나는 눈물을 닦고 오래 참은 숨을 토해내듯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준우와 내가 살아 있는 한 그의 장례식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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