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백수가 됐다. 이후, 너의 핸드폰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센터에 출근을 하지 않았던 날, 너의 전용차도 주차장 안에 정직하게 들어가 있었으니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가 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미 등록된 센터의 아이들에게 전화가 자주 왔던 시간대였다. 너는 받을까 말까의 고민에 앞서 손은 벌써핸드폰을 집고 있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봄이에요.”
“봄아? 이거 네 핸드폰이야? 번호가 다르잖아.”
“이모 핸드폰으로 했어요. 제 핸드폰은 배터리가 없어요.”
봄이었다. 익숙한 그 아이의 밝은 목소리에 너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지고 있었다. 봄은 지난달까지 네게 한국어와 독서교육을 받았던 초등학교 2학년 여학생이다. 봄 외 다른 많은 아이들도작년 11월부터1년을 만났으니 너와는 정이 들대로 들어버린 후였다.
글쓰기에선 짧은 문장력이지만, 당당하게 발표를 잘하는 아이.
여러 아이들 중에서도 봄이는 각별했다. 무척이나 말하기 좋아했던 아이, 수다만큼은 다른 아이들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아주 강했던 아이, 할 이야기가 없으면 지어서라도 해야 했던 아이가 바로 봄이었다. 가끔 수업에 방해가 될 때가 많아 이야기를 못하게 끊어버리면 물기 머금은 촉촉한 눈동자를 보여주었던 아이기도. 태국 출신 엄마가 암에 걸려 병상에 있는데도 늘 밝은 모습을 유지하는 태도가 대견할 정도였다.
봄이의 복잡한 가정환경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병원에 있는 엄마를 대신해 그 아이를 양육하고 있었던 것은 한국인 아빠가 아니라 태국 출신인 친이모였다. 너는 봄의 아빠 이야기를 자세히 물어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지만, 이모 주변의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음식 가게를 하는 이모 주변엔 함께 일을 하는 다른 이모들이 많은 것 같았다. 그 영향으로 봄은 많은 사람들과 소통을 하며 밝은 성격을 유지하고 있었으리라. 그렇게 너는 판단했다. 그나마 이모의 가정에 그 아이의 자리 하나가 들어가 있으니 안심이라면 안심이라고.
병원에서 딸을 만났던 젊은 봄이 엄마. 그녀는 끝내 딸의 곁에 오래 머물지 않고 먼 길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무더위가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던 8월 중순의 일이었다. 이후 수업을 종료해야 하는 너도 유정이 쌓아 놓은 애잔함 때문에 차마 아이들에게 종료일을 미리 알릴 수가 없었다. 아니다. 다른 이유도 물론 있었다. 학기 시작 무렵, '가장 열심히 참여한 친구 한 명에게 선생님의 여행 에세이와 시집 중에서 한 권을 선물로 주기로 한 것!'의 약속을 기억할 듯했다. 끝나는 날까지 계속 읊조리는 반복을 미리 막고자 함이 포함되었다고도.
시 쓰기 필사와 동시를 짓는 수업을 할 때, 나미래 시인의 시집을 활용하기도 했다.
일주일을 남기고 수업 종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나 너의 예상대로 “선생님 책 주기로 한 거 진짜 줄 거예요? 그런데 그 책 누구한테 줄 거예요?” 라며 기억력이 좋은 아이들의 첫 물음을 받았다. 센터에서는 늘 공평하게 나눠줘야 한다는 규율이 강한 곳이다. 때문에 공개적으로 ‘한 명’과 ‘한 권’이라고 밝혀둔 것은 그 책 선물의 의미에 딴죽과 서운치 말라는 신호이기도 했다. 사실 네 마음은 이미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돼)’였다고나 할까.
센터 아이들의 마지막 수업 선물 이야기를 듣던 네 아들이 그런다.
“엄마, 그 책, 누구한테 갈 건지 저는 알겠는데요. ‘답정너’ 아니에요?
너의 아들도 이미 눈치를 챘나 보다.
네 옆에서 종알종알 말을 하고 싶어 늘 붙어 있었던 그 아이의 모습을, 엄마의 안타까웠던 사연을, 네 가족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학교에선 기초학력이 부족해 받는 특별수업을 자랑하던 순수했던 봄은 독서 프로그램에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했다. 어려운 질문에도 유창하게 설명하고 답을 유추하는 모습은 특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업 종료 일주일 전부터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수업을 하지 않아도 독서하는 방법, 읽기와 쓰기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해 계속된 조언을 했다. 봄이 더 새겨들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는지도.
봄에게 조금은 어려운 여행 에세이 책을 건넸던 것은 사진이 많이 담겨있다는 이유 하나였다. 선생님이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사진으로도 봤으면 하는 마음. 또한 책장 뒤에 작게 써둔 네 전화번호와 주소를 기억하고 있으면 했다. 외롭고 힘들 때, 보고 싶을 때, 언제든 전화하면 받아줄 수 있는 그런 네가 되고 싶기도 했다. 봄은 그랬다. 그 책에 써진 네 전화번호를 외워서 이모들 전화마다 한 번씩 전화를 하는 것이었다. 다음에도 다른 이모 번호로 전화가 울릴 수 있을 것이다. 걸리는 전화마다 저장해둬야겠다.
“선생님, 제가요. 선생님 집에 놀러 갈 거예요. 이모가 그랬는데요. 11살 되면 선생님 집에 놀러 가도 된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