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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의 정원이야기 Oct 15. 2016

아침 20분

나미래의 여행이야기_느리게 걷는 소통여행

10개 월 전, 마당이 있는 도시형 타운하우스로 이사를 왔다. 영하 13도의 기록적인 한파가 들이닥치기 한 달 전이었다. 기진해진 땅의 기운은 다행히 가스 온돌로 따스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짐 창고가 된 집에서 봄을 맞이했다. 일제히 줄을 잇고 영역을 넓히는 따스한 온기가 그저 반가웠다. 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일찌감치 봄바람을 눈치챈 마당 흙들 사이엔 푸릇푸릇 자연의 냄새가 풍겼다. 울타리를 두른 정원 나무에는 자리다툼을 하듯 봄을 터트리며 앙상한 가지 사이에 초록 팝콘이 올라앉기 시작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보은을 주는 땅에서 눈을 정화시키며 밟고 살아가는 편안함은 얻었지만, 아이가 전학 온 초등학교와는 거리가 있어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지만,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혼자 걷기엔 부담이 되는 2㎞가 조금 안 되는 거리다. 분양 홍보 팸플릿엔 단지 아이들의 학교 등교를 위해 셔틀버스를 제공한다고 했지만, 오리무중 속으로 이미 날아간 지 오래인 것만 같다.

     

걸어서 학교를 갈 수 있는 방법은 다양했다. 전학을 온 첫날부터 여러 통학 길을 파악하기 위해 아이와 나는 며칠 걷기에 집중했다. 첫 번째 길은 정문을 통과해 왼쪽 내리막길로 향하는 길이다. 이 길 주변은 도심의 경계에 걸쳐 있다. 저 멀리 농촌의 일손 풍경과 주택들이 눈에 들어온다. 수목들과 야생화들이 계절의 바람 따라 얼굴을 내밀고 매연을 걷어내는 솔 향이 근처 집들을 감싸 안고 있다. 볼거리가 많은 대신 신호등 3개를 통과하며 침묵 시간이 길어진다. 두 번째 길은, 집을 나서 오른쪽으로 신호등 하나만 건너면 신호등의 기다림에서 없어지는 길이다. 여러 길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니 이웃 중학교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 있다. 모 아파트 단지를 사선으로 가로질러 학교 후문으로 다시 도착할 수 있었다. 첫 번째와 거의 같은 시간이었지만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몸의 움직임이 있어서인지 숨을 헐떡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세 번째는 두 번째 길과 같은 방향으로 나가 신호등 하나만 건너고 걸어서 학교 정문까지 가야 한다. 가로수로 심어진 나무들의 나이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키가 제법 올라가서인지 햇빛을 가려주는 파라솔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 동탄 탄요공원을 감싸고도는 이 길은 야트막한 공원 산 아래 눈이 녹지 않을 때가 빈번하다. 그래서 언 땅이 녹고 풀리고를 반복할 때는 미끄러짐을 조심해야 하는 길이기도 하다. 시간도 20분이 조금 되지 않는 선에서 도착을 할 수 있다. 아이가 혼자 걷게 되었을 때 가장 효율적인 시간 확보와 편리함, 안전성을 고려하자면 마지막 길이 혼자 걸어야 할 우리 아이에게 적합했다. 깎아지른 작은 산길을 따라 음울하게 펼쳐진 자잘한 다른 길도 다. 학교 주변과 아파트 사이를 뚫고 들어가 학교 정문과 후문에서 만나는 이름 없는 길.

     

그렇지만, 아이와 나는 아침 등굣길을 걷는 것은 몇 개의  종류와 시간을 파악하는 선에서 멈췄다. 얼어붙은 미끄러운 길을 혼자 보낼 수 없었다. 그렇게 겨울 동안 익숙하지 않은 통학로를 따라 아침마다 쉼 없이 자동차는 달렸다. 아니 이른 봄이 되었는데도 걷기에 힘쓰라 아이 혼자 내보내기가 쉽지 않았다. 걸어가는 시간만큼 신호등 앞에서 시간을 먹고, 아이를 내려주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글을 쓰는 아줌마 가정주부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마침 그 생활을 청산하게 된 것은 이웃에 사는 반 친구 엄마 덕분이었다. 늦여름이 기승을 부릴 때까지 출근을 하면서 우리 아이의 등교를 책임져 주었다. 그 이웃은 함께 등교하길 원했던 반 친구들의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다.


  

가을로 접어들며, 아이는 학교까지 걸어 다니고 싶다 하였다. 담임선생님도 반 아이들에게 차량 등교보다 걷기를 권유하고 있었다. 20분 정도면 충분히 걷고도 지치지 않을 시간이라 나는 생각했다. 날마다 조금씩 걷기의 중요성을 구구절절 설파하지 않아도 다. 아이가 뱉어낸 말에 책임을 지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 평소보다 빠르게 집을 나서게 했다. 아이는 학교에 도착해서는 도착했다는 전화를 걸었다. 아이가 혼자 나가는 풍경이 익숙해져 가는 어느 날, 나는 아이와 함께 등굣길을 나서고 싶은 충동을 멈출 수 없었다. 운동을 싫어하는 내가 왕복 40분 정도의 걷기를 통해 오전을 맞이하는 것은 움직임에 게으른 아줌마를 날려 보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비가 오는 날은 아이와 함께 우산을 들었다. 조금 늦게 출발한 날도 차를 끌고 가자.라는 말을 쉽게 내지 않았다. 조금 늦으면 늦은 대로 우리의 아침은 걷기로 습관을 들여가고 있었다. 빠르게 지나가며 신호등과 도착 시간을 가늠하던 차 안에서의 시선은 서서히 발걸음을 따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는 빠르게 걷는 나의 옷자락을 잡을 때가 많았다. 발 보폭이 넓어 아이의 발걸음을 맞추지 못하고 앞서고 있는 나는 앞서도 너무 앞서고 있었다. 간혹 아이는 훌렁훌렁 날아가듯 나보다 빠르게 뛸 때도 있었다. 아이와 엄마 손을 잡았다. 일부러 내가 아이 손을 잡을 때도 많다. 그럴 때마다 아이의 발걸음에 박자가 맞춰진다.

     

아이는 엄마에게 할 말이 참 많은 듯했다. 엄마, 저 'FUCK'라는 뜻이 뭐예요? 탄요공원 산책로 입구의 돌탑을 지나가며 아이가 내게 묻는다. 등굣길에 유난히 크게 눈에 들어오는 돌 기념탑에 큰 글씨의 영어 단어 질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의미를 묻는 것이라면 그저 가만히 설명하고 넘어가겠지만, 페인트 락카로 낙서를 해둔 유난히 어지러운 단어의 뜻에 내가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더불어 손가락 욕이 될 수 있는 부분까지 문화적인 면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유히 낙서를 하고 지나친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학교에서는 짝꿍이 자기 물건을 많이 만진다며, 사물함 열쇠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너에게 관심 있는 것 아니야.라고 묻는 엄마 말에 씽긋 웃으며 그럴 수도 있죠.라는 미묘한 말을 남긴다. 어제는 모둠 친구인 누구 때문에 어떤 친구가 발에 압정이 꽂혔어요. 그 친구 때문에 모둠 점수가 마이너스를 달리고 있어요. 등등의 많은 학교 이야기들을 엄마 귀에 들어오게 한다. 사실 이런 이야기들에 감사함을 안고 있어야 하는 게 분명했다. 일부러 자리를 깔면 내뱉지 않았던 학교의 생활을 엄마에게 조잘거리고 있었다. 학교에서 억울했던 일, 친구들과 소통이 덜 되었던 어떤 일화, 기분 좋았던 일, 방과 후의 수업에 대한 이야기, 그곳에서 만난 친구와 소통했던 이야기들이 그 짧은 오전 시간에 날개를 달고 우리 모자 주변을 맴돌고 있다.

  

학교 정문에 도착할 즈음에는 경비 아저씨게 꾸벅 인사하는 모습을 아이에게 먼저 보인다. 매번 한 박자 빠르게 내가 먼저이긴 하지만, 나를 따라 인사를 하는 아이의 모습에 쑥스러움도 조금씩 날리고 있는 듯하다. 일률적인 가로수의 크기와 거리 간격을 따라 우리도 20분이 채 되지 않는 길을 아침마다 느리게 걷는다. 이젠 서로서로 앞 다투어 제 옷을 갈아입는 가을 웃음이 보인다. 아이의 수다도 나뭇잎 아래서 또르르 구르며 웃는다. 오롯이 내 몸 전부로 유일하게 아이의 말을 받아낸다.

     

원을 그으며 학교 정문에서 다시 반대로 걸어 나가는 나는 다른 곳의 등굣길을 따라 새로운 아침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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