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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의 정원이야기 Oct 15. 2016

#7취직 부탁

나미래의 문학이야기_서정문학, 수필 등단 신인작

 방은 찜통 같았다. 1993년 그해 여름, 전남대학교 후문에 위치한 시멘트 월세 방은 유난히 더 더웠다. 보증금 없이 월세 얼마로 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썩 괜찮은 조건이었다. 대학교 근처이기에 돈 없는 학생들을 끌어들인 집주인의 상술에 나도 조용히 합승하고 있었다. 그것은 돈 없는 경제 사정의 작은 굴욕에서 나를 빼내지 못하는 반증과도 같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 처음 살게 된 곳은 광주였다. 나는 언니나 오빠, 주변 친척들 도움 없이 고향 거금도 섬을 떠나 건설회사의 작은 현장 사무실에 경리로 취직했다. 복잡한 일이 없는 간단한 계산과 사무실만 지키면 되는 그런 곳이었다. 부도로 인해 사무실을 옮긴 것을 시작으로 안정적인 직장이 내게 빨리 붙지 않았다. 그곳에서의 시작은 김 양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썩 화려한 빛이 내리지 않았던 경리 업무의 경력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오촌 아저씨네 장녀였던 육촌 언니는 광주 오치동 변두리에서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와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던 미용실 그 언니의 남동생은 조선대학교를 다니는 재원이었다. 이들은 광주에서 터를 잡은 내가 처음 만난 먼 친척이었다. 불편함을 무릅쓰고, 가난에 서린 부모의 힘이 미치는 영향권 내에서 몇 달간 함께 지내는 것을 허락받았다. 미용실에 딸린 작은방 한 칸에서 나는 그들과 불편한 동거를 시작했다. 짧게 직장을 다니면서도 조금씩 모은 돈은 방송통신대학교 학비로 사용되고 있었다. 미용실에 딸린 쪽방은 세 명이 살기에 턱없이 부족한 공간이었다. 나는 불편한 동거를 벗어나기 위해 그 주변에 싸게 나온 방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 여름의 불볕 열기는 백수가 된 나를 더 못살게 구는 것 같았다. 미니 선풍기에 날마다 머리를 의존했다. 바람 하나도 내 머리카락 사이에서 비켜갈까 아까워했다. 먼 친척 울타리에서 벗어난 자유를 얻었지만 홀로서기가 녹록지 않은 여름이었다.

     

나는 취업을 목표로 하는 60명의 상업과 반에서 2등으로 졸업했다. 그렇지만, 성적 비례로 내놓으라 하는 직장에 취직을 할 수는 없었다. 좋은 직장의 기준을 딱히 나열할 수 없지만 정직에 대한 갈망으로 생활정보지를 손에서 놓지 않은 것도 뿌듯한 일상이라면 일상이었다. 뚜렷하지 않은 그런 직장 찾기 과정은 나의 존재마저 종종 불안하게 만들곤 했다. 엄마는 취직과 휴직을 하며 지내는 딸이 걱정스러워 보였나 보다. 나에게 숨긴 채 고향 시골에서 이사와 광주에 터를 잡은 오촌 친척 아저씨께 취직자리를 부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흥반도 끝자락 작은 섬의 거금도 신금. 동네에서 유일하게 이층 집 옥상이 있었던 오촌 아저씨네. 그 집은 겉보기에도 딱 부자였다. 그 아저씨에게는 나보다 한 살 어린 딸이 있었다. 먼 친척이면서 학교 후배가 되기도 한 그 동생은 동네 친구 누구보다 가진 게 많아 보였다. 유독 바닷바람이 거셌던 어느 겨울, 그 오촌 가족들은 광주의 어느 지역 농협 지점장 발령을 받아 고향을 떠났다. 떠나는 날까지도 그 동생이 부러웠지만 싫었다.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우리 집의 가난에 대한 반항과 오기, 질투였지 싶다. 나는 그녀와 친해지지 못한 체 겉돌기만 했다. 그런 내 마음속 내막도 모르고 그 오촌 아주머니에게 고개를 숙이고 부탁했을 엄마를 생각했다. 내 입장에선 그 상황 자체가 불편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내 마음속에서는 좀 더 잘 난 딸이 되고 싶다고 했다.

     

엄마의 취직 부탁으로 나를 일부러 찾아온 오촌 아주머니는 썩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부드럽지 못한 오후의 햇살은 역시 내 편이 아니었다. 그 아주머니가 내 방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까지 방송통신대 리포트를 준비하며 늦어버린 잠을 청하고 있었던 중이었다. 눈썹 아래 겨우 걸친 나의 눈을 바라본 그 오촌 아주머니는 한마디를 그냥 지나치기는 아쉬웠던 모양이다. 지금 너 뭐 하고 있니?라고 묻는 어투에서 벌써 나를 한심하게 보고 있었다. 더웠다. 마른 땀이 흘러내리는 듯한 긴장감이 돌았다. 오촌 아주머니의 표정을 얼른 읽어낸 덕분에 나의 몸은 더욱 데워지고 있었다. 그녀가 째려보는 그 얼굴빛은 더위 때문이었는지? 무엇 때문이었는지? 분명 그날의 태양 빛보다 더 강렬함으로 오랜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얼마 후, 오촌 아주머니는 '한심'이라는 글자를 얼굴에 다시 쓰고 내 앞에 나타났다. 시댁 사촌 언니인 시골 엄마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고 대형 슈퍼마켓 외근직 판매원으로 근무를 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한 번 하였다. 무슨 배짱이었는지 나는 당당하게 그 아주머니의 제안을 거절했다. 오촌 아주머니에 이끌려 회사를 들어가기 싫었다. 그 이후 나는 지역생활정보 신문을 더욱더 알뜰살뜰하게 펼쳐보는 희망이 있는 아픈 청춘을 보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오촌 아주머니를 제대로 만난 적이 없다. 그때의 정희 엄마라는 오촌 아주머니는 잠깐 일을 쉬고 있는 모습을 한심하게 봤을 터였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나의 자리를 되돌아보며 게을렀던 20대 초를 세탁하고 있었다. 겅성드뭇하게 빠져나가는 형제자매들 누구 하나에게 부모는 도움의 손을 내어 준 적이 없다. 물론 부를 펼치지 못한 가난으로 많은 것을 채워주지 못한 것을 엄마는 세세하게 언어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다. 결국 엄마는 먼 친척 중에서 잘 나가는 그 오촌 아저씨에게 부탁하는 것으로 셋째 딸에게 미안한 마음을 덜고자 했다. 그렇다. 엄마의 마음으로 조금은 안정된 직장을 안겨주고 싶었나 보다. 창피함과 미안스러움, 모든 것을 접어 두고 자식의 앞날에 화려한 길을 위해 고개를 숙였을 엄마. 나는 그래서 갚을 빚이 많다.

     

뒤늦게 취직 부탁을 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엄마에게 소리소리 질러댔다. 철부지처럼. 취직 부탁을 왜 했냐고, 내가 알아서 할 일을, 왜 그 친척한테 부탁을 하냐고, 다른 친척도 아니고 그 아저씨네에.라고. 엄마는 흥분 속에 씩씩거리는 딸에게 딱히 아무 말 없이 그저 바라봐 주고 있었다. 유독 그 집만은 싫었다고 표현하지 않은 내게 끝까지 그렇게 흥분하는 이유조차 한마디 묻지 않았다.

     

새삼 '지린 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고, 손발이 다 닳도록…….'이라는 노래가 초등 교과서에 아직도 버젓이 올라간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은 밤이다.


발표 지면

취직 부탁 『서정문학 』2016년 7·8월 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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