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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의 정원이야기 Oct 15. 2016

하늘을 나는 침대

나미래의 여행이야기_아이와 비행기 타기

아이의 두 번째 여권 첫 페이지에는 미국령 사이판의 입국허가 도장이 찍혔다. 나는 결혼 1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사이판 첫 해외 가족여행에 들떠 있었다. 남편은 해외출장과 국내 출장을 반복하며, 휴일을 반납하고 일에 묻혀 사는 일중독의 남자다. 아이에겐 바쁜 아빠와 함께 떠나는 첫 해외 가족여행이 이제 시작되고 있었다. 결혼 10주년 기념이 아니었다면 이번에도 남편과 여행 날짜를 맞출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의 녹록지 않은 여행 계획 상대였다. 아빠와 함께 떠나는 비행기 여행에 아이는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었다. 지금까지 엄마와 함께 여행하며 보여주지 않았던 그 모습까지 다 내어 보이고 있었다.


아이 엄마가 되고 나서부터는 집을 잠깐 떠나는 여행은 마냥 즐겁기만 하다. 국내여행도 마찬가지이지만 해외여행은 완벽하게 삼시 세 끼를 밖에서 해결한다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가족여행은 아이를 돌볼 수 있는 남편이 동행을 해서인지 좁은 기내에서도 편안함을 느꼈다. 앉자마자 스르르 잠이 밀려왔다. 얼마 후, 무언가 조금 어수선한 소리에 비몽사몽 옅은 잠에서 깨어보니 뒷자리에 있던 승객 남녀 둘이서 어린아이를 사이에 두고 언쟁이 붙어 있었다.      

  “여보세요. 아이가 칭얼댈 수도 있죠. 그렇게 말하면 다인 가요. 뭐요? 경찰서요? 그래요. 가시죠!”

     
비행기는 서울 인천공항에서 3시간 정도를 달려 이미 사이판 영공 내에 진입을 한 뒤였다. 기내에서 아이의 엄마인 한 여자의 목소리는 옆자리의 남자를 향해 격앙되어 있었다. 이미 그 둘은 그렇게 흥분된 대화를 몇 차례 주고받고 난 뒤였다. 자리에 앉아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아이가 칭얼대는 움직임과 장난은 심상치 않아 보였다. 난처한 표정을 짓는 그 가족 옆 자리에 앉은 남성은 그런 아이의 행동을 이해를 못했고, 그 아이 엄마인 여자에게 아이의 행동에 주의를 시키라는 말과 못마땅한 표정으로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었다. 조금은 큰소리가 한참을 오가던 둘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더욱 흥분하고 있었다. 많이 떨어지지 않은 뒷좌석이었지만 뒤를 돌아보며 구경을 할 수도 없었고, 그 둘의 논쟁에 감 놔라 배 놔라 훈수를 둘 입장도 물론 아니었다. 그들의 사태가 조용해지길 바랐다. 특히 아이로 인해 그 남녀가 나눈 말싸움은 문제를 삼고 싶지 않는다는 묵계가 나를 포함한 기내의 많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기내에서는 그들을 탓하는 사람 한 명도 없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다시 만나기는 요원한 사이가 되겠지만 ‘경찰서까지 가자’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을 듣고 있자니 왠지 내 마음이 시렸다. 그 후론 그들도 더 심한 말은‘이제 그만’이라고 스스로 수위 조절을 한 덕인지 더 이상 그들에게서 어떠한 큰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아이 때문에 옆 사람과 언성을 높여야 했던 엄마의 마음은 오죽할까 싶었다. 그리고 좁은 기내에서 그나마 휴식을 취하고 싶었던 그 남자의 마음도 이해가 안 되었던 것도 아니다. 어린아이의 칭얼거림이 섞인 소란스러운 풍경을 보며 아들은 “엄마! 나도 울었지? 나도 저랬지? 근데 저렇게 크게 울었어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내게 묻는다.

  
아이가 만 네 살이 되던 해였다. 나 역시 비행기 기내에서 불편했던 비슷한 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다. 그 무렵, 만학도의 꿈을 이루고 싶었던 나는 새로운 전공에 도전하고자 편입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문제는 필요한 서류를 일본에서 다녔던 대학에서 직접 떼야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법무사에서 공증을 받고 학교로 제출해야 하는 순이었다. 남편에게는 시간이 없어 빠듯하게 혼자 일본을 다녀와야 한다는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다. 아이의 여권은 태어나서 몇 년 지나지 않아 만들어 두었기에 언제든지 아이를 데리고 갈 수는 있었다. 그러나 함께 하기에 내가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게 분명했다. 일본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 후 8여 년 만에 찾는 동경(東京). 그곳에서 7년 동안 유학생활을 했기에 오래된 지인을 만나 조금은 여유를 만끽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했다. 또한 동경(東京) 시내에서 두 시간 남짓 떨어진 학교 캠퍼스까지 어린아이를 데리고 전철과 걷기, 택시를 타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일중독에 빠져 있는 남편을 구제할 방법은 2박 3일 정도 휴가를 내게 하는 것이었다. 출장이 많고 일중독이 될 만큼 자기의 일을 좋아하는 남편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아이를 자기에게 맡기지 않고 데리고 가는 조건’이라면 앞으로 일본이 아니라 어떤 나라에 여행을 다녀도 개의치 않겠다는 것이었다. 남편이 내건 조건은 썩 나쁘지 않았다.

     
어린 아들과 첫 해외여행은 지금까지 해보지 않았던 일이라 나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화물을 부치는 항공 카운터에서는‘가방이 사라져요. 엄마 가방이요. 우리 엄마 가방이.’라면서 손짓을 해대는 탓에 많은 사람들의 웃음을 유발하였다. 출국심사대에서는 엄마 엉덩이 뒤에 숨어 얼굴을 빠끔히 내밀고 심사대 직원에게 부끄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가 타야 할 항공기 게이트까지 걸어가는 동안 아이는 두꺼운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세계 각국의 비행기를 실컷 보는 듯했다. 세계 200여 개가 넘는 나라의 국기에 관심이 많았던 아이는 비행기 꼬리에 붙은 국기를 보며 나라 이름을 나열하기 바빴다. 그러곤 엄마에게 다시 확인을 받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즐거워하는 어린 아들의 이상적인 첫 비행이길 바랐다.


그것도 잠시, 이륙 직전에 아이는 몸의 울렁거림을 처음 맛보았기에 역시 예상대로 울먹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두 시간의 비행 동안 약간의 칭얼거림과 불편한 울음을 보여주며 아이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아이를 어르고 달래어 가슴에 안아보기도 하고 좌석에 앉게도 하였으나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는 아이 때문에 좌불안석이나 다름없었다. 약간 떨어져 있는 좌석 쪽에서 아이의 소음에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인지 약간의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착륙을 시작할 때 다시 아이의 몸에 전달된 전율이 아이를 칭얼대게 만들었다. 아이는 조금 놀란 듯, 계속 울먹거리고 있었다. 나는 ‘괜찮아. 괜찮아. 금방 괜찮아질 거야.’ 라며 아이를 달랬다. 훌쩍거렸던 아이는 이내 진정이 되고 있었다. 나는 ‘언제 도착하나’하며 기진한 채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본 나리타공항에 도착해 승객들이 기내의 통로에서 빠져나갈 때였다. 중간 지점에 앉았던 나는 줄을 지어 빠져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승객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아이가 울어 죄송했습니다.”라는 짧은 인사를 남겼다. 그러자 아이도 함께 옆에서 “울어떠 제송합니다.”라고 엄마 흉내를 내며 또박또박 말을 건넨다. 웃어주는 사람들, 그냥 바라보는 사람들, 미소를 엷게 보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심지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 분도 계셨다. 우리 앞으로 지나칠 때 어떤 한국 분은 몇 살이야? 라며 아이를 향해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아이는 그런 질문도 놓치지 않고 손을 펼쳐 보이며 “다섯 딸이요.”라고 성실히 답변하고 있었다. 아이는 이렇게 첫 비행을 했던 그때를 두고두고 회자하며 ‘내가 울었지. 그때 내가 그랬지! ’라며 기억장치를 발동시키기도 한다. 돌아오는 대한항공 기내에서 다시 만난 어떤 한국인 남자분은 이 녀석 또 만났네. 라며 웃어주었다. 아이에겐 울음으로 시작한 첫 비행이었지만, 결코 나쁜 기억이 없었음은 분명했다.

     
이후, 남편이 내걸었던 썩 괜찮은 조건을 등에 업고 아이와 함께 하늘을 나는 여행을 계획하고 실천했다. 아들과 나는 몇 차례 일본을 더 다녀왔고 동남아시아의 몇 군데를 자유여행 삼아 다녀왔다. 논문의 앙케트 준비를 위해 떠났던 나의 학문 여행에서도, 자유여행에서도, 아들은 나의 든든한 여행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물론 아이는 좁은 기내에서 답답해하며 뒤척이는 모습을 왕왕 보이긴 했다. 그러나 ‘하늘을 나는 침대’로 묘사하기도 하며, 여행 때마다 새처럼 화르르 나는 비행에 즐거워했다. 아이는 여행을 통해 풍부한 어휘력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인색하지 않았다. 엄마와 함께 울지 않는 몸의 성장을 했다. 하늘이 품은 비행기 안에서 달려오는 구름을 만나 좋아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다른 정신적인 성장을 함께 하고 있는 듯했다. 여전히 우리 모자가 탔던 비행기 안에서는 어린아이들의 칭얼대는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엄마! 나도 저랬지?”라고.

     
얼마 전에 모 신문 기사를 통해 ‘기내에는 아이가 울 때마다 승객들의 박수소리와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는 기사 내용을 접한 적이 있다. 바로 미국의 모 항공사가 ‘어머니의 날’을 맞아 ‘하늘을 나는 아기’라는 제목으로 이벤트를 열었던 것이다. 비행기를 이용하다 보면 아이가 칭얼대는 것 때문에 아이 엄마는 물론이요. 기내 승객들 모두가 힘들어 상황을 유익하게 이벤트를 열어냄으로써 엄마들을 위로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엄마이기에 구구절절 음울한 썰을 풀지 않아도 이심전심이 되었던 일화가 아니었나 싶다. 

     
하늘을 나는 침대에서 아이들의 엄마들이 조금만 더 편안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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