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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의 정원이야기 Oct 18. 2016

#9미술관 산책

나미래의 과거 산책_나는 빈센트 반 고흐가 유감스러웠다


그림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니 어떤 유명 화가에 대해 정을 줄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사실적이겠다. 그때가 중학교 2학년 때였지 싶다. 미술 교과서에서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나게 된 것이. 그를 만나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자연스레 내 곁에서 멀어진 그 화가와 얽힌 일화가 심연에서 계속 머물고 떠나지 않는다.

     

내가 다녔던 섬마을 작은 중학교에도 미술부라는 방과 후 활동이 있었다. 그곳에 출입을 하는 친구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던 시절이었다. 그림에 대한 감각이 있었던 것은 분명 아니었지만, 그림 능력과 특별대우를 받는 듯한 친구들의 모습에 시샘을 했던 것이었으리라. 미술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옆 반 친구를 따라 그녀가 그리고 있던 그림을 신기한 듯 쳐다본 날도 있었다. 미술 책에 있던 반 고흐의 그림 속 점묘법이 호기롭게 그녀의 그림 안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이젤에 기댄 16절지 도화지에 옅은 물감으로 수채가 된 그림이 책에서 보던 그의 터치 법과 닮아 있었다.

     

한번 보면 인상적인 것을 두고두고 기억하는 내 잔머리의 기억력은 예외 없이 미술 시간에도 발휘되고 있었다. 나의 실기 그림 안에, 그 친구가 그렸던 대로 흉내를 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림과는 서름한 관계이지만, ‘모방 안에 창조’라는 말을 떠올리며 표현해 보고 싶었었다. 그런데 결국 나는 나의 그림 앞에서 옆 반 친구가 그려줬다는 오해를 사게 됐다. 내가 그렸다고 믿지 않았던 미술 선생님의 평가였다. 점수는 깎였고, 심하게 매를 맞았던 것에서 옛 기억은 멈췄다. 그 이후 어떻게 오해를 풀고 해결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련 장치가 머물러 있지 않다.

     

나는 20대의 대부분을 일본 동경 주변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지냈다. 일본에서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대학 입학에 준하는 1급 자격증이 필수였다. 그리고 비싼 학비를 감당하려 큰 심장과 간, 건강한 육체를 같이 준비해야 했다. 2년여 가까운 일본어학교 생활을 마무리하고 아르바이트에 지쳐가며 대학을 준비하던 때였다. 넓은 섬나라에 갇혀 세상을 향해 몸부림치던 움직임에 틈을 내어주지 않는 음지와도 같았다.

     

일본은 습한 기운이  자주 출몰하는 바다의 나라였다. 헉헉거림과 답답함이 여름 내 도시의 아스팔트와 건물들을 감싸는 길이 좁은 섬나라 동경. 그 도시생활은 점점 익숙하리만큼 익숙해졌다. 그리고 두 바퀴째 눈이 부신 가을을 자연스레 맞이하고 있었다.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의 일본어 회화 능력도 대학을 들어갈 만큼의 실력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물론 대학 합격 조건은 단순 회화가 아닌 점수로서 더 많이 충족되어야 했다. 바로 일본어 능력시험 1급의 합격 여부였다. 그 해 12월에 있을 시험을 위해 신쥬크(新宿), 일본어학교에서 6시부터 시작하는 저녁 아르바이트 전까지 엉덩이를 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은 유난히 분위기가 좋았던 일본어학교 상급반 교실이었다. 레벨테스트 후, 새로 맞게 되는 신입생이 들어오는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기존에 있었던 학우들과 레벨은 같지만 새로운 반을 편성하여 시작하는 그런 날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서의 신입생이란 한국에서 일본어를 구사하며 바로 시험을 보고 통과하는 경우나, 회사 업무의 능력 향상을 위해 무료로 연수를 오는 사람들이 포함되는 경우다. 상급반인 우리 반으로 한국에서 연수를 나온 세련된 한 여성의 등장은 뭇 남성들에게 희망찬 메시지를 안겨 주는 것과도 같았다.


나도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도시적 이미지를 풍기며, 까칠하지 않았던 부드러운 그녀의 화법에 이미 내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어느 정도 많이 있는 것 같은 분위기의 차분함이 보였다. 바로 내가 원하는 어떠한 세련된 여성상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니가 되어 보임직한 그녀는 일본어도 수준급 이상으로 구사하였다. 한국에서 유학 관련 업무를 하고 있었다는 그녀는 회사의 연수 대상으로 뽑혀 3개월 후에는 귀국 일정이 잡혀 있는 상태였다. 나는 그녀와 친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특별히 공감대가 없었기에 어쩌면 그녀 주위에서 쑥스러움을 무장한 채 나를 드러내지 않고 얼마의 시간을 보내기만을 반복했다.

     

같은 공간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사이,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녀와 점점 소통이 많아지고 있었다. 예쁘지 않았던 나와 말을 잘 섞어주는 그녀의 마음이 참 따뜻했다. 부드럽게 처리하는 그녀의 일본어의 억양을 흉내 내며 그녀가 나보다 더 오래 일본에 있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많은 것들을 물어보는 동생의 위치로 이미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유독 잘 따르는 동생을 그녀는 진심으로 잘 맞아주고 챙겨주었다.

     

“미래야, 아르바이트 쉬는 날 언제야?”

“왜요? 저 수요일이 쉬는 날인데요.”

“같이 미술관 가지 않을래? ”

  

미술관, 미술관, 미술관을 가자는 언니의 말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그녀는 그녀만의 부드러운 화법으로 결정권을 쥐었다.

     

“이세탄 백화점 갤러리에서 반 고흐 전이 열리더라. 그림 보고 싶은데 같이 갈 사람이 없다. 언니랑 가자”

     

살아오면서 그해 가을 무렵까지 미술관의 문턱에 발을 옮겨본 적이 없었다. 한국에서의 이야기다. 중학교 때 친구가 그린 반 고흐 그림 기법을 흉내 내자, 그 친구가 그렸다는 오해를 샀고, 그것을 문제 삼아 미술 선생님에게 두들겨 맞은 이후로 처음 듣는 내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이름의 그 화가였다.

     

“언니, 저 미술관 처음 가는데, 괜찮아요? 저, 그림 같은 거 잘 모르는데요.”

     

이렇게 말하며 어색해하는 나를 위해, ‘그림은 보는 것이지, 어려워하는 것이 아니야’라는  짧은 한 마디를 남겨주며 나를 안내해 주기에 이른다. 사실 많이 긴장이 되었다. 미술관의 예절은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그림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언니를 따라다니며 나는 그림이 붙어 있는 그 벽 공간의 색채에 점점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미술 교과서에서 알게 되었고 나만 혼자 유감스러워했던 그 빈센트 반 고흐의 실제 작품인 해바라기가 내 눈앞에 있었다. 눈에 익숙한 그림이었기에 끌리고 흥분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은 분명했다.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그 열네 송이의 노란 해바라기가 바다를 건너왔다. 그 그림이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음은 회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종종 발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다녔다. 조금이라도 내 생각을 들킬세라 그림에서 받는 느낌을 나대로 해석하고 있었다. 화가의 업적이나 그림에 대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잘 모르긴 몰랐으나 분명 그날 느꼈던 것은 한 가지였다. 회한 덩어리였던 나와 헤어지도록 밝은 빛을 준 강렬한 터치의 화가였음은 분명했다.

     

그녀는 3개월이 지나 한국으로 돌아갔다. 이제 그녀는 요원해진 뭇사람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유감스럽던 반 고흐를 자연스레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해 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 덕분으로 작은 나만의 세계를 찾고 싶을 때는 미술관 산책을 나선다. 그곳으로 향할 때는 다양한 색채가 주는 긍정적인 마음이 늘 함께 한다. 기쁘고 싶거나 혼자이고 싶거나 할 때 나는 조용히 그림을 보기 위해 전시 소식에 귀를 기울인다. 특히 해바라기 그림 전시회는 더욱. 그리고 스치듯 하늘에 대고 미소를 띄운다.


우연이라도 미술관에서 그녀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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