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래의 시골이야기_가을 가을 한 날씨에 어울리는 나무이야기
낡은 흙집을 걷어내고 새 한옥을 짓기 시작했던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의 입춘 게였다. 정확한 학령기를 찾아낼 의도는 없지만 머릿속 기억장치는 새집과 헌 집의 경계를 뚜렷이 구분 짓고 있다. 섬 주변을 맴도는 상활한 공기는 집 뜯겨 나가 살 곳 없어 떠도는 무거운 발걸음의 우리 가족을 조금은 인정 없이 세게 껴안아주었다. 그해 첫 큰 일감은 새집을 짓는 곳에 도움을 줘야 하는 가족들의 바쁜 움직이었다. 공사 시작 후 상량이 올라가면서 완공에 더욱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여름 태풍 때문에 개량 지붕의 도당 한쪽이 뜯겨 나간 흔적의 옛집. 다시 한번의 태풍이 오면 지붕이 날아갈 것 같았던 불안한 요소를 미리 막고자 부모는 새집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는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롭게 이어졌다. 한순간 사라진 슬레이트 도당 집에서 십여 년을 함께 한 형제자매는 이웃집을 전전하며 잠자리를 떠돌고 있었다. 찌그러진 무색 슬레이트 지붕, 작은 마당, 은빛 햇볕을 죄다 받고 야생화를 피어낸 뒤란, 빨간 진흙 벽의 작은 방 두 개를 가진 옛집의 기억이 이제는 희미해져 가기만 한다. 뜯어낸 예전 집과 방향만 달리하고 같은 땅 위에 지어진 새집은 아버지의 최대의 재산이 되었고 가족에겐 희망의 끈처럼 보였다. 창고 하나 남기고 옛집에서 자라는 키가 무척 컸던 두 그루의 떨 감나무를 데리고 온 것은 부모님의 배려였겠다. 아니 빨갛게 주렁주렁 영글어 있는 효자 과수를 그대로 내치기에는 미안함도 있었을 수도. 집을 완공할 무렵 가족의 역사와 터전을 지켜내는 방식을 고스란히 이해하고 있는 두 그루의 감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다도해가 훤히 보이는 경치 좋은 곳 앞뜰 한 귀퉁이에는 푸세식 화장실이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용하며 다리가 저려왔던 곳이다. 나무판 변소 옆 뜰에는 덩치가 큰 떨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집의 구조와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조망 때문에 윗부분의 가지가 심하게 잘린 채 몸뚱이만 남겨졌다. 유독 진한 햇살을 방출하는 뒤꼍의 담벼락 사이에도 또 한그루의 감나무가 있었다. 완성된 집의 지붕에 거칫거린다는 이유로 그 역시 지붕에 가까운 큰 가지들은 기척도 없이 사라졌다.
잔뿌리가 없는 감나무를 옮겨 심으면 잘 죽는다 하여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요즘은 세계 많은 나라에서 감나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옮겨 심으면 한국과 중국 일본 아시아 지역 밖에서는 잘 살지 않는다는 말을 어느 책에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그것도 옛 기록이지 않을까도 싶다. 세계 각국에서, 추운 많은 나라에서 감나무의 생존 소식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동양적인 주체성의 나무를 끔찍이도 애정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을까. 100년이 된 감나무에는 1,000개의 감이 연다 하여 감나무 고목은 자손의 번창과 아들 낳길 비는 신앙의 의미가 담겨 있었음을. 부모님은 여러 추억의 새김을 기억해 내셨을 것이다. 무엇보다 두루뭉술한 감나무의 자태에서 눈 밖에 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이 선다. 수백 년을 살면서도 목숨이 길고, 새가 깃을 들이지 않으며, 벌레가 많이 꾀질 않고, 열매가 달고, 단단한 나무로써 까칠하지 않은 나무를 옆에 두고 싶었을 것이다.
감나무는 두꺼운 잎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자랑이기도 하다. 특히 단풍 진 감나무 잎을 시엽지(柿葉紙) 아니면 자연전(自然箋)이라 하여 글을 쓰기도 하는 종이가 된다고 한다. 그 두꺼운 잎을 자랑하는 감나무는 까칠한 태양의 시선을 잘 감싸주는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겨울 일감 채비를 하는 곳은 심줄이 선명히 드러난 두꺼운 이파리가 무성한 감나무 아래서였다. 바다에서 직항으로 올라오는 해풍은 골목길의 그늘에서 한 번 미끄러진다. 그러면 조금이나마 시원하고 유연한 녀석으로 변신을 하여 반복 노동으로 숨 쉴 틈이 없는 아버지의 땀을 미리 닦아내 주기도 했다.
감나무는 나무 자체가 단단하여 화살촉이나 요즘은 골프 머리채로도 많이 쓰인다고 한다. 그런 단단한 나무의 성질을 내 몸이 익숙하게 알았을 터이다. 탄탄한 두 나무 덕분에 여자아이인 나도 감나무를 힘차게 밟고 오르락내리락 거릴 수 있었다. 홍시에 눈이 멀어 나무에 오르는 나를 보고 부모는 늘 걱정이었다. 가을에는 많은 과실 중에서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떨 감의 홍시가 유독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어린 시절은 감나무에 올라 가을 간식을 따 먹으며 누구에게도 내놓기 싫었던 욕심 많았던 동심이 내려앉았다. 과일가게 좌판대나 과수원이나 가로수에 지천에 널린 21세기 근자의 홍시를 보면서 그 동심을 떠올리고 있으니 말이다.
감나무는 부모만을 남기고 5남매가 떠난 시골집에 남겨져 나이를 먹고, 늙어가면서도 가지를 뻗고 정신과 외모도 굵어졌다. 어느 순간엔 사내아이 같았던 나에게 놀이터가 되어주었고, 간식을 내어주었고, 시원한 그늘 아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일터를 만들어 주었다. 오뉴월에 샛노란 감나무 꽃이 떨어지면 감꽃을 주워 실에 꿰어 목걸이를 했었지. 민간에서는 감나무에 벌레가 생기지 않고 새가 집을 짓지 못하는 나무이기에 감나무 꽃이 떨어진 감꼭지를 차로 달여 마시면 유산을 방지한다는 속설이 있다. 몇 번의 유산이 되기 전에 미리 알았더라면 좀 달여서 마실 것을 그랬다.
우리 집 마당에도 다가올 봄엔 감나무를 심어야겠다. (20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