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세상에 대해
어렸을 때 언니와 마법사 놀이를 했었다. 놀이 방법은 간단하다. 누군가 상대방의 가짜 이름, 이야기 속의 우리 이름을 부르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가 마법사라는 가정 하에 말을 주고받으면서 이야기를 지으면 된다. 이 이야기 짓기 놀이는 꽤 계속되었지만 남긴 기록이 별로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깝다.
내 인형, 베폴이는 상상속의 마법사 세계에서 같이 활동했다. 나의 부하 정도의 존재였던 것 같다. 마법사 놀이를 더 이상 하지 않는 나이가 된 언젠가 힘들 때, 다시 그 놀이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경쟁심을 느꼈다. 상상속의 베폴이도, 상상속의 미레티아도 정말 잘났는데, 현실에서 나는 그런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있지도 않은 존재와 싸울 순 없고, 상상 속의 존재와 같게 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네가 그 세상에서 잘난 만큼 나도 이 세상에서 잘날거야, 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렇게 현실에 없는 존재에게 선전포고하고 나는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했다.
베폴이를 보면 볼 때마다 자꾸 나와 언니가 만든 세상이 떠오르고, 그러면 경쟁상대, 상상속의 내가 다시 떠오른다. 힘들때면 베폴이는 상상속의 세계에서 나를 보좌했던 것처럼 현실에서도 위로해준다. 물론 인형이라서 말도 못 하고 표정도 못 바꾼다. 단지 내가 만든 그 세상이 베폴이를 나에게 더 소중한 존재로 만들어 준 것 같다.
p.s. 나중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 일어나는 흥미로운 일들'이라는 책을 읽어 보니 상상속에서 경쟁하는 사람이 나 혼자인 것은 아니더라.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너무 공상에 빠져 있는 것은 안 좋지만
그 공상이 현실에서의 나를 보듬어 줄 수 있으면
상상속에 나만의 가짜 세상이 있는 것도 좋다.
힘들 때면 그 세상으로 숨어보기도 하고
기쁠 때면 그 세상에 있는 가짜 나에게 잘난 척 하고....
나에게는
현실과 공상을 적절이 배합하는 것이
힘들 때 견딜 수 있는 힘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