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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레티아 Oct 11. 2020

슈렉의 의미

독일어 schreck: 경악, 놀람, 공포

어릴 땐 다들 창작 욕구가 조금씩 있다. 나도 그랬다. 요즘 내가 주로 쓰는 글은 정보를 주는 글, 소소한 에세이, 그리고 어마어마한 과제밖에 없지만 어릴 땐 나름 소설이란 걸 썼었다. 지금 보면 시답잖은 글들이고, 흑역사이긴 하지만 그 당시엔 담임선생님께 보여줄 만큼 자부심이 있던 그런 이야기였다.

내가 소설을 쓸 때 제일 힘들어했던 부분은 등장인물의 이름을 정하는 것이었다. 왠지 한국 이름으로 했다가는 친구들이 연상될 것 같고, 외국이름으로 하자니 아는 게 없고. 결국 내가 선택한 방법은 과학에서 쓰이는 접두사였다. 킬로, 밀리 뭐 그런 것은 많이 나오니까 안 쓰고, 페타 테라 등 잘 안 쓰이는 걸로 말이다. (요즘은 테라도 많이 쓰는 듯...) 그 외에도 히브리어 찾아보고 별 희한한 것을 많이 참고했다.

하지만 그 이름은 등장인물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영화나 애니메이션 등장인물은 그 외모, 행동과 어울리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짱구, 딱 하는 행동이랑 어울리는 이름이다. 슈렉, 초록색에 몸통 크고 귀가 희한한 그 외모에 엄청 잘 어울린다. 심지어 그 이름은 흔하지도 않다. 대체 그런 이름은 어디서 어떻게 지어오는 걸까?

캐릭터 슈렉. 출처: https://heroes-and-villians.fandom.com/wiki/Shrek

그러다가 최근에 독일어 공부를 하다가 schrecklich라는 단어를 보았다. 발음하면 '슈렉크리히'. 뜻은 '무서운, 싫은, 지독한'이라고 한다.

'어? 혹시 슈렉이라는 단어도 있나?' 그렇다, 슈렉이라는 명사도 있었다. 뜻은 경악, 놀람, 공포. 심지어 schreck이라는 후철도 있다. '혐오, 공포를 일으키는 사람'의 뜻으로 'Kinderschreck'이라 쓰면 '아이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Schreck의 뜻. 네이버 독일어 사전
후철 schreck의 뜻. 네이버 독일어 사전

실제로 슈렉은 철자가 'Shrek'으로 좀 다르지만, 독일어 Schreck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사실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캐릭터가 영화에서 괴물이라고 오해받고 그런 모습이 있지만 공포나 혐오의 대상이라니, 슈렉 부모님이 슈렉에게 그런 이름을 붙여줬을 리가 없잖아. 차라리 그가 속한 종(species)이 슈렉이라면 인간이 편견을 담아 이름을 지었구나, 하고 생각할 텐데 말이다. 좀 안타까웠다. 어릴 적에는 굉장히 이름의 어감과 캐릭터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모를 때는 그냥 그렇게 생각했는데, 뭔가를 알게 되니 조금 그 이름에 불편해지는 것 같다.

그러다가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인터넷에서 유머사이트 등을 보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는데, '슈렉의 실존 모델.jpg'이라는 글을 읽게 되었다. 드림웍스가 정식으로 슈렉이 모델이 누구라고 설명한 적은 없다. 하지만 슈렉은 말단비대증을 앓고 있는 프로레슬러 '모리스 틸레'와 외모가 흡사하다.

(좌) Maurice Tillet (우) Shrek. 출처 허핑턴포스트 shorturl.at/dftES

나는 의학을 전공한다. 수업을 듣다 보면 교수님이 '이 표현은 차별적인 뜻이 담겨있어서 다른 말로 써요.' 혹은 '요즘은 정상치(normal range)라고 부르기보단 참고치(reference range)라고 불러요' 등의 말을 하실 때가 있다. 예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썼던 용어들인데, 점점 사람을 배려를 하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새로운 용어가 입에 잘 붙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가 생각 없이 쓰는 말로 상처 받을 수 있는 분들이 있으니 변경된 용어를 꼭 써야겠다고 매번 다짐한다.

그래서 그런가, 슈렉의 뜻을 알게 된 이후에 더 마음이 착잡하다. 설마 진짜 그분을 모델로 쓰고 슈렉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인가? 물론 슈렉의 결말은(내가 1편밖에 안 봐서 1편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해피엔딩이었고 교훈을 주는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뭔가 찜찜한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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