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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레티아 Mar 20. 2021

책에 적힌 것 vs 가까운 사람의 이야기

할아버지의 사망 원인

나는 어릴 적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계산해보면 5살 때의 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아니, 장례 중이었으니 다음날이었을 수도 있겠다) 아무 생각 없이 예쁜 꽃상여에 명절날만 볼 수 있는 친척들에 신나 있었다. 집안으로 못 들어가게 하는 어른들이 희한하기만 했는데 나가서 놀라니 개구리도 잡고 신나게 뛰어놀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 건 그 다음날 상여를 따라가는 길이었다. 그것이 내가 겪은 첫 죽음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우리에게 할아버지가 왜 돌아가셨는지 자세히 설명해주시지 않았다. 애초에 5살에게 설명해봤자 얼마나 이해했을까 싶다. 지금 내가 단순히 기억하는 키워드는 식도, 출혈(피가 났다), 술. 나는 어른들이 술을 마시면 목이 타들어간다는 표현을 하니까, '아, 술을 많이 마셔서 식도에서 피가 났구나!'라고 간단히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가, 술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가 박혀서 스무 살 이후로도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

의과대학에 들어와서 여러 질병들에 대해 배우면 그 내용을 내가 들었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입해보게 된다. '어, 이분이 최근에 이러이러하다는데 혹시 이 병은 아닐까?', '저번에 누가 이 병에 걸렸다는데 이런 것이었구나...' 그리고 지난주 수업 때 '식도, 출혈, 술' 키워드에 딱 맞는 질병을 찾았다. 알코올성 간경변에 의한 식도정맥류. 아빠에게 전화가 왔을 때 물어보았다. 혹시 할아버지가 식도정맥류로 돌아가셨냐고... 정답이었다. 아빠는 내가 몇 시간 동안 배운 수업내용을 간단히 전화로 요약했다. (확실히 주변 사람이 아프면 그 병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되는 것 같다...)

참... 오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알코올성 질환은 시선이 안 좋다. 술을 끊으면 되는데 '안' 끊으니까 병이 생기고 안 낫는 것 아니냐고. 알코올성 간경화이신 분들은 간이식을 해도 음주를 하는 경우가 왕왕 있어서 최소 6개월 간 금주를 한 경우에만 간이식을 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게 수업 때는 당연하다며 고개가 끄덕여지고, 납득이 갔다. 그지, 그런 분들에게 소중한 장기를 줄 순 없지. 가뜩이나 대기자도 많은데. 그런데 막상 우리 할아버지가 알코올성 간질환으로 돌아가셨다니, 뭔가... 착잡하다.

과거에 인터넷에서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 남이 게이인 것은 신경 쓰지 않겠지만 내 자식이 게이인 것은 문제이다... 나는 당시에 그 표현에 '글쎄, 그렇게 느끼는 것은 남에게 위선을 행하는 것 아닌가? 본인의 가치관이 제대로 섰다면 고민할 이유가 없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그 표현이 이해가 간다. 아무리 내 가치관이 확실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함께했던 소중한 경험, 시간을 바꿀 순 없다. 내가 아무리 알코올 질환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더라도, 우리 할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했던 것은 변함이 없고, 지금도 그리운 것은 바꿀 수 없다. 난 내 가치관 때문에 할아버지의 죽음이 부분적으로 당연하다고, 그렇게 죽음을 겪을 만했다고 느끼진 않는다. 굉장히 모순적일 수 있지만, 그것이 나의 생각이고, 나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느낄 것이다.

앞으로 의사가 된다면, 아니 당장 실습을 돌 내년부터라도, 나의 생각 때문에 병원에 계신 분들에게 상처 주는 시선을 보이고 싶지 않다. 닥터 하우스에 보면 비만 환자에게 네가 많이 먹고 운동을 안 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말하는 캐릭터가 있다. 그 사람이 가족 중에 비만 환자가 있다면 그렇게 배려 없는 말을 하지 않았을 텐데. 정말 모순을 용납하지 않는 재수 없는 놈이다. 난 꼭 머리로는 자업자득이라고 느끼는 질병이 있어도 지금 내 감정을 생각하며 사람들을 배려하며 대해야지.

p.s. 어릴 때는 내가 뭐든지 다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어렸던 나에게 설명을 자세히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이었는데, 성인이 되고 알려주지 않은 것을 스스로, 늦게 깨닫게 되면서 나이에 맞는 이해력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또한, 어릴 때 알았더라면 당연하게 넘겼을 텐데 지금 알아서 스스로 당연한 것인지 고민해볼 기회가 생겼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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