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상동형
개강 3일 차. 다행히 첫 주는 수업이 좀 널럴해서 여유롭게 들을 수 있다. 오늘 오전에는 소화기학 수업을 했다. 급성 복증, 장폐색증 등에 대해 배웠는데 교수님이 장폐색증으로 인한 탈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한 '소화관은 사실 밖이라고 볼 수 있죠'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사실 소화관은 몸 외부에 있다. 그리고 인간은 도넛이다(라고 오늘 아침까지 생각했었다). 이 개념을 이해하려면 '위상동형'이라는 개념을 조금 이해해야 한다. 말은 되게 어려워 보이는데 그림을 보면 생각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참고로 위 사진은 실제로 파는 제품이다. 무려 이 제품을 소개하는(?) 동영상도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NlqYr6-TpA&ab_channel=HenrySegerman)
보면 도넛이 모양을 조금씩 바꿔가면서 궁극적으로 손잡이 달린 머그컵이 되었다. 즉, '위상수학적으로 동형이다'라는 표현은 이렇게 구멍을 뚫거나 찢지만 않으면 사실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좀 더 쉽게 이해하려면 찰흙을 끊어먹지 않고 만들 수 있는 모양이랄까. 공 모양 찰흙을 받아서 '자, 네가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어봐. 대신에 찰흙을 뜯거나 새로 연결하면 안 돼!'라고 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러면 당신은 절대 도넛을 만들 수 없다. 도넛을 만들기 위해서는 공 가운데를 꾹 눌러서 구멍을 뚫거나, 원통형을 만든 다음 양 쪽을 붙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과 도넛은 위상수학적으로 동형이 아닌 것이다.
(좀 더 쉬운 이해를 위해 아래 그림을 하나 더 첨부하였다.)
그래서 소화관은 사실 외부이다. 인간을 찰흙이라고 생각하고 주물럭주물럭하면 소화관은 도넛의 가운데 뽕 뚫린 부분에 해당하지 않는가. 고로 인간은 도넛이다... (논리적 비약이 크지만, 이과드립이다.)
잠깐, 생각해보니 인간은 도넛이 아니다.
인간... 구멍 생각보다 많은데?
왜 예전에는 이 유머(?)를 보고 아무런 의심을 하지 못했지? 콧구멍도 있고 구멍이 얼마나 많은데...?? 해부학을 다 배우고 소화기학을 배우고 있는 지금 절대 웃어넘길 수 없다.
자, 그럼 인간이 구멍 몇 개짜리 도넛인지 알아보자. 사실 고민을 해보다가 '분명 나 말고도 누가 이런 생각을 했은 텐데...' 하고 검색해보니 굉장히 좋은 동영상을 발견했으니 이걸 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egEraZP9yXQ&ab_channel=Vsauce
동영상은 20분이고 영어이니 시간이 부족하신 분들을 위해서 짧게 설명해보겠다. 일단 체표에 있는 구멍을 세어보자. 위상수학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생각했을 때, 콧구멍 2개, 입 1개, 귓구멍 2개, 항문 1개, 요도 입구 1개, (여성) 질 1개, 그리고 잘 생각을 못하는데 눈에서 비강으로 연결되는 눈물점 4개가 있다.
이 중 요도 입구, (여성) 질은 따라 올라가면 막혀있다. (요도는 신장에서 끝나버리고, 질은 자궁에서 끝난다.) 뽕 뚫린 게 아니므로 대야처럼 그냥 눌러서 만들 수 있는 부분이라서 위상수학적으로 구멍이 아니다. 또한, 아쉽게도 귓구멍은 고막으로 막혀있다. 그러니 이 역시 위상수학적으로 구멍이 아니다. 따라서 단순 구멍이 8개가 있는데 사실 얘네는 다 연결되어있다. 눈물점은 비강과 연결, 비강은 구강과 연결, 구강은 항문으로 연결... 그렇기 때문에 위상수학적으로 따져보면 구멍이 7개라고 볼 수 있다. 잘 이해가 안 가면 항문 쪽 구멍을 상상 속에서 크----게 넓힌 다음에 위에서 꾹 눌러버리자. (아래 그림 참고)
그런데 사실 인체에는 복강과 흉강 등의 잠재적 공간이 있어서 꽉 채운 도넛은 될 수 없다. 피어싱 하신 분은 몸에 구멍이 더 많다. 관찰 단위를 줄여보면 모세혈관 사이는 약간의 구멍이 있어서 노폐물, 영양분 등이 통과가 가능하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지면 7개보다 훨씬 더 많다. 뭐, 그런 거 다 따지다 보면 공부를 할 수 없겠지만... 오랜만에 재미있었다. ㅎㅎ
다음에는 두개골이 위상수학적으로 구멍 몇 개짜리인 도넛인지 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