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리 님께 보내는 여섯 번째 교환일기
1. 그대 이름은 아픔이 아니라서
「그대 이름은 아픔이 아니라서
내가 아무리 아프다 해도 그대는 대답이 없다.
그대 이름은 슬픔이 아니라서
내가 아무리 눈물을 흘려도 그대는 돌아보지 않는다」
스물다섯 무렵에 썼던 글일 거예요. 평생 자신의 판단에 대해 별다른 확신이라는 걸 갖고 살아오지 못했지만, 그래도 '시는 내 길이 아니야'라 생각한 것만큼은 잘한 것 같아요. 스물다섯 무렵에 저 정도 밖에 못썼으니까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아프다'는 말이 자신을 부르는 말인 줄 알고 달려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세상에 '아프다'라는 글자를 이름에 넣어둔 사람이 있을까요?
사실 '아프다'라고 말하는 사람 곁에는 다가서기가 쉬운 것도 아니에요. 섣부르게 다가서서 도리어 상처만 헤집고 가는 사람도 많기에, 내가 그런 섣부른 사람이 될까 싶어 조심스럽게 가던 발길도 멈추게 되죠.
위로에도 자격이 필요한 것 같아서 손을 내밀다가도 도로 집어넣게 돼요. 상대는 마음에 먼지가 내려앉았을 뿐인데 내밀고보니 내 손이 피투성이인 것 같은 기분일 때도 있어요. "저리 가, 이건 아니잖아," 란 소릴 들을 것만 같아요.
또 다시 별명을 지을 일이 있을까 싶긴 하지만 거기엔 '아프다'라는 글자를 넣어볼까 싶기도 해요. 그럼 나름 합법적인(?) 핑계가 될지도 몰라요.
"아파."
"나 불렀어?"
이렇게 말이죠.
"너 아냐."
하면
"아니구나."
하고 도망치면 되겠죠.
2. 연습중
솔직히 혜리 님의 일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하지만 마냥 기다리기만 한 건 아니에요. 몇 번은 먼저 보낼 일기를 써보기도 했었죠. 사소한 이야기들이었어요. 친구 할머니 장례식장에 다녀온 이야기. 다녀와서 몸살이 났던 이야기. 이어서 감기도 왔고, 그리 좋지 않은 일들과 옆구리에 꽂혀 천천히 다리를 굳게 만드는 잔펀치 같은 일상의 이야기들. 막상 적으면서도 '이걸 왜 적고 있을까?' 싶어지다가 애써 한 단락 적고 나면 제 기분이 먼저 우하향 화살표 (↘) 를 그려서 '이건 보내지 말자' 하고 접게 되는 글들이었죠.
혼자 생각했죠. '이건 아무래도 무탈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그리고 또 생각했어요. 혹시 혜리 님도 요즘 이런 걸까?
혜리 님의 대답이 "너무너무너무 바빴어요." 라거나 "헤비 님께는 그다지 하고 싶은 말이 없었어요." 인 편이 훨씬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혹시 혜리 님의 기분도 저처럼 우하향을 그리고 있다면 지금 당장 양 볼을 손으로 잡고 나지막히 '아아' 하고 소리를 내보세요. 그 다음 목 스트레칭을 하고 기지개를 크게 켜 보는 거에요. (지금 제가 그러고 있습니다.)
약간 현기증이 느껴질 만큼 근육을 당기고 나니 혜리 님께 글을 쓸 용기가 생겼어요.
저는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교환일기를 일종의 테니스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테니스를 떠올리니 감히 '우리'가 좋아하는 작가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 같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글이 떠올랐어요.
『아름다움은 경쟁 스포츠의 목표가 아니다. 그러나 최고 수준의 스포츠는 인간의 아름다움이 가장 잘 표현되는 무대다. 그 관계는 용기와 전쟁의 관계와 대충 비슷하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아름다움이란 특정한 종류의 아름다움이다. 운동적 아름다움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 아름다움의 힘과 매력은 보편적이다. 이것은 성별이나 문화적 규범과는 아무 상관없다. 이것은 오히려 인간이 육체를 가졌다는 사실과 화해하는 것에 관계된 일이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에세이 「페더러, 육체이면서도 그것만은 아닌」 중에서-
제가 보내는 글의 대부분은 네트에 걸려 건너가지도 못할 거예요. 애써 넘겨도 선 밖일지도 모르고요. 하면 할수록 실점 뿐인 것 같아서 솔직히 점점 자신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에요. 그러나 언젠가는 정확히 혜리 님이 그어놓은 마음의 선 안에 들어가는 날도 오지 않을까요?
그러면 랠리가 시작될 수 있겠죠? 테니스가 예술이 되는 건 랠리 속에서 만들어지는 기막힌 곡선들 때문이지 승패는 사실 큰 상관이 없듯이, 우리도 언젠가 그런 랠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 날이 오겠죠?
곰곰히 생각할수록 왠지 저만 잘 하면 될 것도 같은데 말이죠.
3. 새해 목표
이번 주에 설날이 있잖아요. 조카들 줄 세뱃돈을 뽑으며 허리가 휘는 기분을 살짝 느껴보다가 안그래도 미뤄둔 새해 목표를 세워보기로 했어요. 그나마 뒤숭숭하던 세상의 일들도 하나하나 정리되는 기분이고, 당장 제 일을 더 미룰 수도 없는 형편이어서 말이죠.
그러나 늘 그래왔듯이 새해 목표라는 게 세운 내용의 10퍼센트도 다 못채우는 게 현실이라 일종의 체념 비스무리하게 '이걸 해서 뭐하나' 싶은 기분이 또 밀려온단 말이죠.
허나 오늘 교회 설교 시간에 마치 그걸 들킨 것마냥 (전 가끔 이런 경험을 하는데) "계획 세운 거 10퍼센트만이라도 하고, 또 내년이 오면 다시 힘내서 10퍼센트 채우고 그러는 거다. 멋대로 체념하지 마라!"고 한 소릴 들은지라, 계획을 세워보기로 했답니다.
심지어 아예 못 다 이룰 거 각오하고 제 깜냥의 약 500%정도로 목표를 대폭 상향해서 아예 숨이 턱 막히게 목표를 세워보기로 했지요. 여기에 10퍼센트만 이뤄도 무려 평소 성과로 따지면 약 50%를 이룬 셈이니(수학이 약해서 계산이 잘못되었더라도 양해해주세요.) 결과적으로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진 거예요.
물론 계획을 얼마나 거창하게 세우든 다 지나고 손에 쥐는 건 예전과 같은 양일지도 몰라요.
그래도 뭐, 새해 목표를 세우며 잠깐이나마 다 이룬듯 뿌듯해하는 것처럼 새해를 맞아 즐거운 일이 또 어디있겠어요. 그 즐거움을 포기할 이유도 없는 것이지요.
혜리 님은 새해 맞아 다시 시야를 멀리 멀리 보겠다고 하셨는데 지금쯤은 어디까지 보셨으려나요? 혹시 저처럼 "그래, 멀리 보는 것도 설날에 보자." 하셨으려나요? 그랬다면 "역시 우린 잘 맞는다고요!" 하고 칭찬해드릴 거랍니다.
4. 사소한 화두
유튜브 쇼츠를 보다가 귤까는 법에 대한 걸 접했어요.
요건 꼭지고요
요건 배꼽이라고 했을 때
쇼츠를 올린 사람은 자긴 평생 배꼽으로만 따왔는데 남들이 꼭지로 딴다고 해서 이상하다는 거였어요. 저도 귤 먹을 땐 꼭지로 따서 꽃받침처럼 껍질을 깐 다음에 알맹이를 하나씩 쏙쏙 뜯어먹거든요.
그런데 사진 속의 레드향 같은 놈들은 도무지 꼭지가 따지질 않아서 사방을 과즙 범벅으로 만들다가 문득 '배꼽따기'가 생각이 나 해보았더니 잘되더란 말이죠.
쇼츠를 볼 때는 "배꼽따기라니 사파야, 사파." 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제가 도움을 받을 줄이야.
결론: 사진찍기를 핑계로 가져온 레드향 먹을 거예요.
설연휴에 눈 많이 내릴 거라는데 연휴 동안 어딜 다니시든 미끄럽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길만 이어지시기를.
새해에는 레드향처럼 달달하고 상큼 시원한 이야기들이 오고가기를.
조만간 또 다른 연습공들을 모아서 날려보낼게요. 언젠가 하나쯤은 혜리 님의 마음에 '통' 하고 가볍고 상큼하게 떨어지겠죠? 그때까지 부디 행복하시길요!
추신. 레드향 사진이 묘하게 환공포증 비스무리한 걸 불러오는 거 같아서 급하게 페더러 사진을 추가했어요. 사진이란 거 참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