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그래도 혜리 님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라온 맑은 태양 사진을 보면서 '좋다. 진짜 좋다."라고 생각했는데 글에 넣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새해 첫 아침에 올라오는 해를 보겠노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어요. 혼자 너무 오버인가 싶지만 이래저래 새해가 된 기분도 들지 않았어요. 연말이 너무 정신이 없었고, 좋은 소식도 없었고, 오늘도 뉴스를 잠깐 보다가 속이 터져서 서둘러 껐고요. 하지만 어쩌면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탓이 아니라 순전히 '나이 더 먹는 거 싫어.'란 본능적인 저항일지도 몰라요.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고 드는 거죠. 새해 아침에 떡국 안 먹으면 나이 안 먹은 걸로 해준다 그럼 좋겠어요. 미안해요, 시작부터 이상한 소리해서.
다 좋아질 것을 믿고 응원해주신 것도 감사해요. 언젠가부터 주변에 응원의 말을 못하고 살아요. 힘내라는 말이 잔인하게 들리기도 하고요. "안그래도 힘 없는데, 니가 힘내란다고 힘이 나니?"란 말이 되돌아올까봐 겁도 나고요. 그런데 혜리 님 말이 맞아요. 응원을 못하는 진짜 이유는 '다 나아질 것을 못 믿어서'일지도 몰라요. 신기하네요. 유신론자인 저는 모든 것이 좋아지고 나아질 것을 믿지 못하고 미리 체념해버린 탓에 응원도 하지 못하고, 무신론자라 말하는 혜리 님은 좋아질 것을 믿고 응원을 해주고요. 뭔가 많이 뒤바뀌었는데 그 뒤바뀜이 제 입장에선 묘하게 재미있어서 웃음이 나네요.
23년 말부터 24년 초까지 저희 친구들 모임을 한동안 시끌시끌하게 했던 키워드는 '신점'이었어요. 다들 나이를 먹고 슬슬 이직을 하고 창업을 하려다보니 불안해진 모양이더라고요. 청주를 간다, 통영에 유명한 사람이 있다더라... 한 번은 암사동에 유명한 보살님이 있다 해서 친구 둘이 가는 길에 따라간 적도 있어요. 물론 안에 들어가진 않았답니다.
이런 이유 때문이에요. 저희 친가가 있던 동네는 전라남도 여수 앞에 있는 돌산도라는 섬이거든요. 지금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옛날엔 당연히 배가 왔다갔다 했고, 섬이니 미신이 무척 당연했겠죠. 어느날 큰 굿판이 벌어졌는데 저희 할머니 할아버지가 우연히 구경을 하게 되셨데요. 낮은 싸리나무 울타리 넘어로 안을 들여다보고 계셨는데 갑자기 작두 위에 오르려던 무당이 두 분을 노려보더니 가까이 와서는 '어서 가라'고, '예수쟁이가 보고 있으면 부정탄다'고 해서, "거 꽤 용하네" 하고 오셨데요. 그런데 제가 무당 앞에 앉았는데 점괘가 술술 읊어지면 신기할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깊은 자괴감이 몰려올 것 같단 말이죠. 진 기분이 들 거 같아요.
얘기해드렸나요? 그렇다고 사주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느냐. 아니에요. 지금껏 사주는 딱 한 번 봤어요. 한동안 사주카페가 엄청나게 인기였을 때가 있었어요. 강남역이고 압구정이고 온통 사주카페였죠. 안에 가면 공주풍의 빈티지 가구로 밝게 꾸며져 있는데, 사주 보는 분들이 돌아다니면서 만원 받고 사주를 봐줬어요. 강남역 가는 길에 그때 만나던 친구랑 둘이 갔죠. 그 친구가 또 사주같은 걸 좋아했던지라 안보고 지나칠 수가 없더라고요. 거기서 사주보는 아저씨가 했던 말 중 기억나는 건 둘 뿐이에요. 여자가 큰 나무라 모두 다 안아주고 살펴주고 그늘 아래 두려고 한다. (내심 만족하는 표정이더라고요.) 남자는 역마살이 있다.
역마살이라니. 그때 저는 집밖에 돌아다니는 걸 극단적으로 귀찮아했던 인간이라 속으로 '이거 영 꽝이다'하고 있었어요. 그 카페는 지금도 만나는 고등학교 동창 녀석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이었는데, 난 그 녀석이 자리에 오자마자 복채 니가 대신 토해내라고 손부터 벌렸죠. 그런데 지금은 돌아다니는 게 영 싫지 않은 걸 보면 사주가 한참 후에 맞는 경우도 있나 하고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혜리 님이 새해 계획을 물어보셔서 그때부터 부랴부랴 고민을 시작했는데, 막상 새로운 게 없네요. 24년에 못 이룬 걸 이월하는 느낌이에요. 「올해는 꼭 연재를 한다.」라는 문장 뒤에 몇 가지 각오만 덧붙이는 거죠. 노골적이고 극단적인 느낌으로요. 벽에 대가리를 들이박으라던가, 분량을 못 채우면 굶으라던가.
가장 구체적인 실천방안은 이런 거죠. 하루에 적어도 글 두 개는 쓰자. 보통 짧은 분량의 글도 하나 쓰고 나면 맥이 탁 풀려서 다음으로 못 넘어가는데 이젠 그러지 말자. 마음을 조금 더 조여보자. 프로가 되고 싶다면 프로 답게 굴자. 이런 식으로요.
평소에는 F성향이다가 일을 시작하면 갑자기 사람이 T로 바뀐다고, 예전에 주변에서 같이 일하기 싫다는 소리를 듣곤 했는데(그 좋던 헤비군은 어디로 가고 이 T발놈은 무엇이냐며, 물론 그땐 T발놈이라는 용어는 없을 때였습니다만) 아무래도 올해는 헤비-T로 스스로를 몰아붙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미신은 잘 안믿는다면서 MBTI는 꽤 잘 믿는 거 보면 이런 것도 신기하긴 해요. 그죠?
혜리 님이 다시 계획을 세우고 싶다고 하셔서 저는 그 마음을 응원하기로 했어요. 아자아자! 잘 될 겁니다. 분명해요. 확실하게 믿고 있어요. 내일도, 모레도, 한 달 뒤도, 일년 후도 혜리 님의 눈에 맑게 보일 거예요.
계획이 꼭 이루어지지 않아도 좋아요. 영화 「기생충」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기택은 아들인 기우에게 이렇게 말하죠.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이 뭔지 아니? 무계획이야." 그런데 대왕카스테라가 실패하고 가세가 기울고 마음이 꺾이지 않았다면 어떤 아버지도 아들에게 그렇게 말하진 않았을 거예요. 계획이 없다는 게 마음이 꺾였다는 뜻이라면, 계획을 도로 세우는 건 마음을 세운다는 이야기니까 계획이 이뤄지든 아니든 저는 혜리님이 세우는 계획도, 마음도 다 응원하고 있을래요.
가끔 어떤 영화 대사는 스크린과 제 입에서 동시에 튀어나올 때가 있거든요. 처음보는 영화일 때 그러면 온 몸에 소름이 돋죠. '그래 저 말 밖에 없지.' 싶고, 대사를 쓴 작가(감독)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정확하게 알겠고 그래요. 기생충에서 기택이 저 대사를 말할 때도 그랬어요. "그렇지. 무계획 말고는 없지."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그 시절 제 마음이 꽤나 곱게 갈린 모래사장 같았나보다 싶네요. 아무리 모래성을 세우려고 해도 아무 것도 세울 수 없는 모래사장 말이죠.
5년 후의 계획, 10년 후의 계획은 상상력이 꽤나 필요한 일이라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어떤 계획은 부딪히기도 하네요. 마음 속으로는 일년 동안 전국에 있는 야구장 한 번씩 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너 그거 하면서 글은 어느 세월에 쓸래?'라고 하면 괜히 신났던 야구팬 헤비가 시무룩해지는 거죠. 이거 거르고 저거 빼고 25년에 꼭 하고 싶은 일 하나 꼽자면 올해 연말에도 순천만 습지 가서 예쁜 노을을 보고 싶어요. 가능하면 그땐 조금 더 좋은 카메라를 챙겨가볼까 싶기도 해요. 물론 굳이 카메라가 없어도 괜찮겠어요.
글을 마치려다가 문득 이런 상상을 해보고 있어요. 올해 12월에 혜리 님이 갑자기 "나 연초에 세운 계획 중 이거 이거 해냈거든요. 잘했으니까 선물 내놔요!" 라고 말하는 거죠. 저는 약간 어리둥절하면서도 또 부랴부랴 어떤 선물이 좋을까 하고 고민을 하겠죠? 그닥 과하지만 않다면야(뒤에 따라붙는 동그라미 갯수가 문제겠죠?) "이거 사줘요!"라고 해도 룰루랄라 하면서 택배포장을 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럼 혹시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저의 계획 안에 '혜리 님의 2025 계획 완성'이 들어가는 거죠. 누군가가 소원을 말해보라 하면 이걸 반드시 이뤄달라고 말하고 싶기는 한데, 이게 저의 계획이 될 수도 있을까요? 저의 노력과 의지만으로는 도무지 이뤄낼 수 없는 계획인데 왠지 계획 리스트에 넣어두고 싶단 말이죠. 이건 장난기일까요, 악취미일까요, 아니라면 믿음일까요. (몇 번을 곱씹어봐도 저는 이걸 믿음이라고 하고 싶어요.)
어찌 되었든 당장 가장 중요한 건 혜리님이 감기에서 낫는 거라 생각해요. 이불 푹 뒤집어 쓰시고 따뜻한 유자차나 생강차 많이 드세요. 뒹구르르 하시다가 잠도 많이 주무셨으면 좋겠어요. 이거 제 계획의 체크리스트 안에 넣어두면 이뤄주실 건가요? 이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