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비 Aug 30. 2024

아직도 거기에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도 향일암

1

여수는 아버지의 고향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고향이기도 하고

고조 할아버지 부터의 무덤이 있고

여전히 많은 친척분들이 살고 계신다.

물론 내가 가깝게 여기는 친척은 아니다.

아버지의 고모, 아버지의 이모, 아버지의 삼촌...

내게는 다 먼 분들이다.


아버지는 여수에 오는 걸 좋아하신다.

난 대놓고 여수는 볼 게 없다 타박을 한다.

그런데 진심이다. 여수는 볼 게 없다.

난 여전히 장범준이 왜

여수밤바다라는 노래를 불렀는지 알지 못한다.

여수밤바다는 정말 볼 게 없다.


내게 있어 여행은 좋은 카페를 찾는 일이다.

좋은 커피숍은 일단 좋은 커피를 내려야 하고

좋은 풍경을 안고 있어야 한다.

만약 좋은 디저트를 같이 판다면 금상첨화다.

그런데 여수엔 그런 카페가 없다.

첫 모금을 마셨을 때

"오늘은 이 한 모금으로 풍성해졌다." 라고

만족을 주는 카페를 찾지 못했다.

동시에 좋은 풍경을 안고 있는 카페가 드물다.

인스타감성에 기댄 카페들은

가보면 모든 게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마음에 드는 풍경을 찾았을 때

카페 운영시간이 발목을 붙잡았다.

"이 카페에 앉아 저녁 노을을 보면 행복할 거 같아."

라고 생각하고 나왔는데

평일은 저녁 6시면 문을 닫는단다.

이해는 간다. 어쩔 수 없다.

문을 연 들 손님이 얼마나 오겠나.

그러나 문을 닫으면 아무도 오지 못한다.

카페가 닫힌 게 아니라 노을이 닫힌 기분이었다.

2

물론 여수에는 볼 거리가 많다.

엑스포 쪽에 가면 아쿠아리움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아르떼뮤지엄도 있고

(정작 여수가 아닌 강릉에서 가보긴 했지만)

해상케이블카도 있고

포차거리도 있다.

배를 타고 나가면 섬 투어도 꽤 괜찮다 하고

바다 위로 놓인 다리를 따라 드라이브를 해도 좋다.


그런데 정작 그 모든 건

두 번 가기엔 진짜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

여수는 아쉽게도 쓸만한 해수욕장이 없다.

이번에도 무슬목을 일부러 찾아 가봤지만,

나름 몽돌해수욕장이라 하기에 가봤지만,

이게 몽돌이냐 짱돌이지 싶었더랬다.

자칫 발 한 번 잘못 딛는 순간 전치 4주는 나올 것 같은

마치 트랩같은 험난함.

이럴 바엔 차라리 모래를 사다 뿌려두는 게 낫지 않나

이건 좀 아니다 싶더라.

3

뭐 이리 험담과 비난의 연속이냐고?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현실이다.

대신 딱 하나 늘 괜찮은 곳이 있긴 하다.

바로 여수 앞 돌산도 맨 끝에 있는 향일암이다.

난 불교신자가 아니라지만

조용한 절을 찾는 걸 좋아한다.

우상숭배라고 비난을 할 수도 있겠지만

작은 관음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간절한 이의 뒷모습은 늘 아름답기만 하다.


무엇보다

향일암 앞바다는 남해 최고의 절경이다.

지금껏 다행히 아쉬웠던 기억은 없다.


다만 매번 여수를 오며 이 향일암에 들리진 않는다.

여수 시내에서만도 여기까지

자동차로 구불구불한 길을 30분은 달려와야 한다.

지금은 그나마 좀 길이 닦여 나아진 거지

예전에는 더 심했던 길로 기억한다.

향일암으로 오르는 길은

좁은 바위문을 여럿 통과해야 하는데

예전에는 더 좁았던 기억이 있는 길이

그 사이 많이 닦였다.

가만 보니 절의 세력도 조금 커졌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화재가 있었고 그 이후 정비가 된 듯 하다.

우리 가족은 향일암 아래에서

2박을 했는데

올해가 가장 장사가 안된단다.

안그래도 성수기인데

이렇게 사람이 없나 싶었다.

심지어 얼마 전 있었던

소설커머스업체의 지불체납 문제가

이쪽 숙박업소에도 있었다고 한다.


내가 누린 고요는 때로 누군가의 고통일 수도 있다.

함부로 고요를 바라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4

향일암은 원래 입장료를 받는다

하지만 아침 일찍 가면 문이 열려 있다.

이게 넉넉한 자비이려니 생각하고

대신 최대한 조용히 사진 몇 장 찍고 돌아나온다.


예전에는 없었던 것 같았는데

바다를 향한 앉을 자리가 몇 곳 보이더라

한창 때의 여름이기도 했거니와

아침식사 예약이 되어 있다보니 바로 나왔지만

언젠가 맑은 물 한 잔 앞에 두고

한참 앉아있다 나와도 괜찮겠다 싶었다.

5

지금껏 여수 여행에서 맛집이란 곳을 찾지 못했다.

늘 뭔가 과했다.

간이 강하고, 시고, 달고.

다른 곳도 아닌 내 입맛의 본향이

바로 이 곳임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핏줄을 타고 난 사람의

음식부심을 채워주기에 여수는 늘 미달이었다.

제대로 된 여수 음식을 먹기에는

내가 이미 여수가 관광지가 된 이후로 내려왔나보다 싶을 정도로.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다 괜찮게 먹었다.

사진으로는 과해보이는데

입맛에는 딱 적당하다.

무엇보다 된장찌개 인심이 좋다.

넉넉히 들어간 돌게를

오래 우려낸 국물은

마음을 평화롭게 해줬다.


이런 게 좋다.

어디서나 먹을 법 한데

다른 데서는 먹지 못할 것 같은 맛 말이다.

6

바다를 두고 말이 참 많은 시절을 산다.


어디서는 바다에 오염수를 쏟아내고

어디서는 그게 오염수가 아니라 우겨대고

어디서는 엄연한 이 나라의 섬을 팔아먹을 궁리를 하고

어디서는 바다처럼 도도하고 장구한

역사의 흐름을 한 줌 인간의 힘으로 바꾸려고 한다.

그러며 다른 이들을 미개하다고 한다.


미개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미개하다는 건 남보다 더 나은 옷을 입지 못하고

남보다 더 나은 조리법을 갖지 못하고

남보다 더 쾌적한 집에서 살지 못한다는 뜻일까?


진정한 미개함은

남보다 더 나은 옷을 입어야만 더 나은 줄 알고

남보다 더 나은 음식을 먹어야만 더 나은 줄 알고

남보다 더 나은 집에 살아야만 더 나은 줄 아는 게 아닐까?


미개한 인간은

남의 것을 빼앗아 내 배를 불리고,

그것을 부끄러워 할 줄 모르고,

그것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종자들을

무작정 따라하기만 하면

자기도 그렇게 힘이 생길줄 착각한다.


바다는 여전히 저기 저렇게 빛나고 있다.

인간의 끝모를 미개함을 넉넉히 받아내면서도,

한없이 찬란하게.

7

솔직히 향일암은 하룻밤이면 족하다

손님이 많이 줄다보니

밥집들 맛도 줄었다고 아버지는 한탄하셨다.


여수 시내에 있는 호텔이 참 좋기는 하다.

나도 안다.

요 근처 동네 중에 여수가 호텔은 꽤 괜찮다.

(나도 늦가을 다시 순천만에 온다면

잠은 여수에서 잘 거 같으니)


그래도 하루 쯤은 향일암 아래

조금 낡은, 그러나 인심 넉넉한 숙박업소에서

하룻밤 자고 아침부터 일어나

빛나는 바다를 맞으러 올라가는 것이

여수 여행의 유일하고도 참된 낙 아닐까 싶다.


다음에 왔을 땐 동네가 예전처럼

조금 더 북적거렸음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곁에 있는 것을 가장 모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