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은 어렵다. 난 바둑을 잘 두지 못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못둔다. 그래서 내 눈에는 둘 곳이 많은데 프로 바둑기사들이 장고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기만 하다. 그렇다. 내가 보는 '둘 곳'은 실상 둘 곳이 아니라 그냥 '빈칸'일 뿐이다. 하늘에도 길이 있고, 바다에도 길이 있다. 바둑판 위에도 마찬가지다. 나 같은 동태눈깔에게 그 길이 보일 리가 없다.
커제와 신민준
나는 E스포츠의 대표주자인 리그오브레전드를 할 줄 모른다. (피시방 가서 처음 해보았을때 같은 편이 왜 그리 내 부모님 안부를 물어대던지 그 충격에 바로 손을 뗐다.) 그래도 보는 건 재미있다. 일단 직관적이고 유불리가 선명하게 눈에 보인다. 하지만 바둑은 정말 모르겠다. 멍하니 보고 있는데 갑자기 한쪽이 자기가 잡았던 돌을 집어들더니 도로 반상위에 올려놓고 패배를 선언한다. 끝나는 타이밍조차 보이지 않는다.
사진에도 보이는 중국의 커제 선수 같은 경우에는 대국 도중에 자신의 뺨을 사정없이 갈기는 영상으로 유명한데 (물론 정말 대단한 커리어를 가진 선수다.) 그 순간 아마도 커제의 몸은 두 가지 시제로 나뉘었을 거다. 손은 미래의 커제요, 뺨은 과거의 커제다. 그 몇 초 사이에 바둑기사는 미래를 다녀온다.
14,000,605개의 미래를 보는 중
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바둑기사들이 보기에 이미 바둑은 끝나있다. 그러니 아직 빈 칸이 많이 남아있음에도 패배를 인정하고 돌을 거둔 후 자리에서 일어난다. 승패가 자명한 바둑을 끝까지 두는 건 바둑에서는 예의가 아니라고 한다. 그건 프로인 상대방이 착각하거나 실수하기만을 바라는 것 뿐이라서, 말그대로 상대를 프로취급해주지 않는 거라 해석해도 되기 때문이다.
모자이크는 잔뜩 사심을 담아, 혈압을 위해 이름까지 지워버리고 싶었으나
2024년 12월 3일은 갑자기 한국 현대사의 한 장면으로 남을 밤이 되었다. 윤석열이 갑자기 담화문으로 비상계엄을 발표했다. 계엄의 포고령은 그야말로 끔찍한 문장들의 퍼레이드였다. 처단이라니. 무협지에서도 유치해서 안쓸법한 단어가 계엄 포고령에 실렸다.
그날 밤 시민들, 기자들, 그리고 야당 국회의원들은 국회로 정신없이 몰려들었다. 담을 넘다 넘어지고 피를 본 의원들이 상당수였다. 상식을 가진 군인들과 경찰들은 몰려든 시민들을 애써 막지 않았고 국회의 전기를 내리지 않았다. 국회는 두 시간 반 여만에 계엄해제 결의를 통과시켰고, 윤석열은 '국무위원들이 아직 오지 않아 회의 정족수가 미달 중'이라는 되도 않는 핑계를 대며 시간을 끌었으나 결국 반나절도 되지 않아 계엄령은 해제되었다.
누군가는 이걸 해프닝이라고 하지만, 어서 정신과에 가보길 바란다. 이건 결코 해프닝일 수가 없다. 군인들이 총과 실탄을 들고 국회를 침범했다. 명백한 내란이고, 윤석열에 의한 친위쿠데타다. 쿠데타의 목적은 야당과 국회를 무력화시키는 것이었고, 부정하겠지만 모든 쿠테타의 끝은 독재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이것은 누구나 아는 뻔한 수순이다.
국회의원 안철수 까방권 백만개
이런 상황임에도 여당인 국민의 힘은 비상식적이고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윤석열의 탄핵안을 가로막았다. 이게 오늘까지 이어진 수순이다. 여기서부터 한 번 앞으로 이어질 수순을 짚어보기로 하자. 내 보기에 시나리오는 몇 개 남지 않았다. 실상 거의 외길수순이지 싶기도 하다.
우린 이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윤석열에게 살 길이 있나? 이게 정말 극적인 질문인 이유는 이게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는 법정에 끌려가는 순간 죽은 목숨이다.
내란죄는 대통령도 기소대상이 되는 중범죄로, 공소시효도 없다. 사형, 무기징역 말고는 다른 처벌이 없다. 한마디로 윤석열은 12월 3일자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쿠데타를 일으킨 이들이 모두 독재를 향해 가거나 독재를 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다른 살 길이 없어서다.
두 달이 지나든, 이 년이 지나든, 이십 년이 흐르든 그는 언젠가는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럴 바엔 누구나 20년을 선택하지 않겠나? 윤석열이 2차 쿠데타를 꾸미지 않고 어설프게 한동훈과의 공모로 이 일을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거야 말로 알코올성 치매 증상이라고 봐야 한다. 당장 한동훈은 12월 3일날 체포명단에 들어있던 사람 아닌가. 어떻게 믿지? 노태우도 죽마고우인 전두환을 백담사로 내모는 세상 아닌가.
지도자의 자질 중 결단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
한동훈과 국민의 힘은 시간을 벌고 싶어한다. 이재명이 선거법 2심 유죄만 받아도 해볼만 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시간은 윤석열의 편도 아니고 동시에 한동훈의 편도 아니다. 여권의 모든 2인자는 1인자와의 디커플링을 통해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한다. 그런데 12월 7일자로 한동훈과 국민의 힘은 윤석열과 한 몸이 되어버렸다. 이 상태로 한동훈이 입지를 확보하려면 정치, 경제, 사회적인 세 가지 과제를 수행해내야 한다.
정치적 과제는 윤석열의 빠른 구속수사다. 일단 여기서부터가 스텝이 꼬일대로 꼬였다. 말 그대로 모순이다. 윤석열의 빠른 퇴진을 막기 위해 한동훈이 나섰는데, 정치적 과제가 빠른 구속수사라니. 하지만 구속수사를 하지 않은 채 어설프게 또 출장조사 쯤으로 때우려고 한다면 한동훈과 국민의 힘은 어마무시한 역풍을 맞게 될 거다.
여기서 12월 7일에 있었던 두 가지 장면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는 이재명 대표가 탄핵시한을 '크리스마스, 연말 이전'으로 못박은 거다. 이 '선긋기'는 국민들의 머리에 철저하게 각인되었다. 이게 국민들이 윤석열을 참아줄 수 있는 시한의 최대치라고 미리 프레임을 짜버렸다.
두 번째 사안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는데 바로 김건희 특검법 부결이다. 아무리 탄핵이 급해도 야당이 김건희 특검법을 이대로 포기할 리가 없다. 재발의해서 통과시키는 순간 외통수다. 진짜 물어보고 싶다. 거부할 건가? 이제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윤석열이 거부권을 쓰는 게 아니다. 한동훈이 거부하는 거다. 거부권을 쓰는 순간, 한동훈은 탄핵을 막기 위한 허울뿐인 바지사장이라고 자백하는 꼴이다. 동시에 윤석열과 한동훈은 무엇으로도 떼놓을 수 없는 한 몸이 된다. 거부권을 안쓸거라면 어제 통과되게 내버려두는 편이 나았다. 한동훈은 이리가도 죽고 저리가도 죽는데 이걸 부결했다는 건, 국민의 힘은 여전히 윤석열, 아니 김건희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뜻이다.
왜 윤석열과 한동훈이 한 몸이 되면 한동훈이 죽는가? 한동훈에게는 다른 정치적인 자산이 없다. 경력도 일천하고 지역기반도 없고 세력도 없다. 있는 거라고는 차기 대권주자라는 이름값 뿐인데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그 마지막 자산마저 신기루처럼 날아가버릴 것이다. 한동훈의 힘이 미약해지면 윤석열은 도로 당 장악력을 올리려고 들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게 바로 검찰의 움직임이다. 다시 사정정국을 불러 일으키고 보수언론을 동원해서 다른 이슈를 키우려고 들 게 뻔하다. 그런데 여기까지 가려면 적어도 4개월에서 6개월여는 시간이 필요한데, 문제는 경제다.
12월 3일 쿠데타 소식에 곧장 반응한 게 바로 환율이다. 지금도 환율은 억지로 찍어누르고 있다. 외국인들의 투자가 본격적으로 빠져나갈 것이라는 소문이 들린다. 어제의 탄핵 부결로 외신들은 한국의 불확실성이 높아졌고 장기화될 것이라는 소식을 타진했다.
애초에 경제가 괜찮았다면 여당이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한동훈이 풀기 가장 어려운 게 바로 이 경제적 과제라는 거다. 법적으로 한동훈과 한덕수는 나라를 대표해서 무언가를 결정할 권한이 단 하나도 없는 상태다. 그런 이들이 정치적으로 뭔가를 해보겠다고 덤벼본들, 국내와 국외의 경제주체들이 신뢰를 줄 이유가 단 하나도 없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 상태로 외환위기가 온다거나 부동산 PF문제가 다시 떠오른다거나 심지어 생활물가만 폭등해도 한동훈과 국민의당은 자신들이 칼자루가 아니라 달궈진 칼날을 쥐었다는 걸 알게 될 거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과제는 당연히 국민여론이다. 당장 계엄이나 쿠데타를 교과서로 배웠던 10대 20대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박근혜 탄핵과 윤석열 탄핵은 질적으로 다르다. 모두가 총을 든 군인을 목격했다. 심지어 수도 서울 한복판이었다. 불상사가 일어났다면 그 대부분이 서울시민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20대가 '세월호 세대'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이 무엇보다 공정과 정의와 상식에 민감한 것은 그것 때문이다. (물론 그들 중 일부가 마치 3.1운동 이후 허무주의에 빠진 지식인들마냥 이상해져버린 게 안타깝지만.) 그들은 자신들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말한다. 맞다. 이건 길게 참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국민여론은 시간에 따라 자연스레 악화될 것이다. 이미 대놓고 '국민의 힘은 위헌정당'과 같은 직설적인 표현들이 언론과 평론가의 입을 통해 쏟아지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한동훈과 국민의 힘으로서는 진퇴양난이다. 그래서 문득문득 코너에 몰린 저들이 2차 계엄령에 동의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때는 당연히 유혈사태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는 무솔리니의 최후 같은 장면이 펼쳐져있을 것이다. (그 사진은 끔찍해서 옮겨오고 싶은 마음은 없다.)
결론은 하나다. 현 여권은 사태가 심각해지기 전에 돌을 던져야 한다. 되도 않은 탄핵 트라우마 같은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라.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반박했다. 너희의 탄핵 트라우마보다 국민들이 계엄군의 총칼과 군홧발에 느끼는 트라우마가 백만배는 크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혹시 잠든 사이 무슨 변고가 있었진 않았을까 싶어 휴대폰 뉴스부터 열어본다. 탄핵 트라우마가 별거냐? 시험에 낙제점을 맞아서 부모가 회초리 든 게 다다. 그런데 이젠 아예 시험을 보지 않겠다고 드는 거 아니냐. 이쯤되면 부모자식 하지 말자는 뜻이다. 국민들 입장에선 알고보니 혈연이 아니라서 호적에서 파버려도 될 거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민주주의에 시원한 결말은 없다. 맞다. 최선은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결말이다. 평화롭고 무난했던 밤에 갑자기 칼을 꺼내 든 강도 몇 사람만 솎아내자는 게 그리도 어려운가? 그들은 이미 죽은 돌이다. 국민의 힘 구성원과 지지자들은 죽은 돌에 미련을 갖다가 민주주의의 역사에 오명을 남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죽은 돌만 버린다면 우린 다음 바둑판에 마주 앉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