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08] <중간계>
※ 영화 '중간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AI 사용을 전면에 내세운 <중간계>는 확실히 무언가를 이뤄냈다. "뭐야?"라는 반응으로 관객을 하나로 만드는 데 성공했으니까. 물론, 제작진이 원했던 방식은 아니겠지만.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해외에서 불법 도박 사이트로 거액을 벌어들인 '재범'(양세종)이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한국에 돌아온다. 장례식장에는 그를 반기는 사람이 없다. 대신 각자의 목적을 품은 낯선 이들이 조문객 행세를 하며 모여든다. 국정원 요원 '장원'(변요한)은 '재범'과 모종의 거래를 했고, 그를 반드시 풀어줘야 한다.
반면 서울청 외사과 팀장 '민영'(김강우)은 '재범'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려 혈안이다. '장원'과 함께 온 배우 '설아'(방효린)는 과거 마약 스캔들로 추락한 커리어를 '재범'을 통해 되살리려 한다. 방송국 PD '석태'(임형준)는 '재범'에게서 투자금을 받아내고 싶어 한다. 장례식장은 금세 긴장으로 가득 찬다. 그런데 이 모든 계산을 무너뜨리는 변수가 등장한다. '물개'(이무생)라는 조폭 중간보스가 '재범'의 돈을 노리고 부하들을 풀어 그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장원', '민영', '설아', '석태'는 차를 몰아 납치범들을 추격한다. 그러다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가 발생하고, 네 사람은 눈을 떠보니 낯설면서도 익숙한 공간에 갇혀 있다. 바로 이승과 저승 사이, '중간계'다. 이곳에서 그들은 12지신의 모습을 한 저승사자들에게 쫓기기 시작한다. 호랑이, 돼지, 원숭이, 뱀 등 자신의 띠에 해당하는 저승사자가 나타나 영혼을 거둬가려 한다.
<중간계>의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중간계'의 로고가 등장하는 20분 정도가 지나면서, 영화는 안국역 지하철, 조계사, 광화문 광장을 가로지르며 추격전을 이어간다. '사천왕'이 나타나 그들을 돕고, '염라대왕'(이양승)과 '해태'가 대결을 벌인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어떤 의미인지, 왜 '사천왕'은 이들을 보호하는지, 저승사자들의 목적은 무엇인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아니, 설명할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60분이라는 러닝타임은 생각보다 짧았고, 영화는 한창 속도를 내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 "To be continued(계속)"라는 자막이 떴다. 극장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가, 곧 "뭐야?"라는 탄식이 이어졌다.
<중간계>를 연출한 강윤성 감독은 이미 2편 시나리오를 완성했다고 했다. 애초에 시리즈물로 기획했다는 뜻인데, 관객에게 미리 알려야 했다. 8천 원을 내고 극장에 들어간 사람들은 한 편의 완결된 영화를 기대했을 터. 아무리 러닝타임이 짧아도, 그 안에서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나길 바랐다. 그러나 <중간계>는 관객에게 반쪽짜리 경험을 안겼다. 마치 케이크 한 조각을 시킨 줄 알았는데, 빵 부스러기만 받은 기분이었다.
기자간담회에서 강윤성 감독은 자신 있게 말했다. "VFX로 처리하면 폭파 장면 하나에 4~5일이 걸리는데, AI를 활용하니 한두 시간 만에 끝났다." 효율성의 승리였다. 권한슬 AI 연출 역시 크리처 액션을 AI로 구현하며 기술적 성취를 강조했다. 12지신, 사천왕, 해태, 염라대왕까지. 총 18종의 크리처를 생성형 AI로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분명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한 게 있다. 관객은 제작 과정의 효율성에 돈을 내지 않는다. 영화가 몇 시간 만에 만들어졌든, 며칠이 걸렸든 그건 제작진의 문제다. 관객은 극장에 앉아 스크린을 보며 이야기에 몰입하고, 감정을 느끼고, 무언가를 경험하길 원한다. 기술은 그 경험을 풍부하게 만드는 도구일 뿐이다. 아무리 첨단 기술을 동원해도 이야기가 빈약하면 영화는 텅 빈 껍데기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공개된 사전 Q&A에서 제작진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강윤성 감독은 "AI는 철저한 도구일 뿐, 연출, 연기와 같은 크리에이티브한 영역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권한슬 AI 연출도 "기술의 발전 속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지만, 그보다는 콘텐츠 본질의 스토리텔링과 연출이 더욱 중요해질 것 같다"라고 말한 것. 그렇게 AI 크리처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크리처들이 왜 존재하는지, 인물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대한 고민은 부족했다. 기술 과시에 집중하다 보니, 정작 중요한 이야기를 놓쳐버린 셈이다.
일례로, '중간계'에 들어선 순간부터 배우들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소리 지르고, 뛰고, 넘어지고, 다시 뛰는 것의 반복. 'AI 크리처'가 화면을 지배하면서 인물들은 배경처럼 밀려났다. 배우들이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관객이 그들의 위기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크리처들이 실사와 어우러지지 못하고 겉돌았기 때문이다. 결국 배우들의 노력은 완성도 낮은 AI 영상 속에서 희석되어 버렸다.
<중간계>를 보며 계속 떠올랐던 생각이 있다. '이게 정말 개봉할 준비가 된 영화인가?' 국내 최초 AI 활용 장편 영화라는 타이틀은 분명 의미가 있다. 영화 산업에서 AI 기술의 가능성을 탐색했다는 점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 실험이 관객에게 어떤 경험을 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부족했다. 2부 제작 여부는 흥행에 달려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2부를 보러 오는 관객이 얼마나 될까? 1부에서 배신감을 느낀 사람들이 다시 극장을 찾을 이유가 있을까? 제작진은 관객의 신뢰를 잃었다. 그 신뢰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중간계>가 한국 영화계에 남긴 유산은 두 가지다. AI 기술 활용의 가능성,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뼈아픈 증거. 이 영화를 본 다음 세대 영화인들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기술은 도구다. 진짜 무기는 이야기다. ★
2025/10/15 CGV 용산아이파크몰
※ 영화 리뷰
- 제목 : <중간계> (Run to the West, 2025)
- 개봉일 : 2025. 10. 15.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61분
- 장르 : 액션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강윤성
- 출연 : 변요한, 김강우, 방효린, 임형준, 양세종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