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에서 만난 보석 같은 영화들

[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22] 15회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감상 영화

by 양미르 에디터
4813_4979_2940.jpg 사진 = 15회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한 러쉬코리아 우미령 대표(왼쪽), 배우 홍석천(오른쪽). ⓒ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전 세계 퀴어영화의 최전선을 만나볼 수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퀴어영화 축제,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가 지난 11월 6일 CGV 피카디리1958에서 15번째 막을 올렸다. 올해부터 한국 단편경쟁 부문 '작품상'은 '러쉬코리아 프라이드 어워드', '연기상'은 '홍석천 프라이드 어워드'로 명칭을 변경하며, 영화제가 지향하는 '연대와 존중'의 가치를 한층 확장했다. 홍석천은 "후배 배우들이 더욱 자유롭고 당당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길 바란다"라고 전했다. 37개국 114편이 11월 12일까지 상영되는 가운데, 몇몇 작품을 관람한 에디터의 후기를 올린다.


4813_4980_3140.jpg 사진 = 영화 '더 보이 위드 핑크 팬츠' ⓒ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1. <더 보이 위드 핑크 팬츠>

- 섹션 : 월드 프라이드
- 감독 : 마르게리타 페리
- 출연 : 클라우디아 판돌피, 사무엘레 카리노, 사라 초카 등
-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상영시간 : 114분

'안드레아 스페차카테나'(사무엘레 카리노)는 노래에 재능이 있는 평범한 중학생이다. 교황 합창단 오디션에 합격했으며, 학업 성적도 우수하다. 그곳에서 만난 '크리스티안'(안드레아 아루)은 매력적이지만, 유급생이다. '안드레아'는 그를 도와 공부를 가르쳐주며 친구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크리스티안'은 '안드레아'가 교황 앞 공연에 선발되자 거리를 둔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안드레아'는 '크리스티안'과 다시 같은 반이 된다.

어느 날 어머니 '테레사'(클라우디아 판돌피)가 사준 빨간 바지가 세탁 후 분홍색으로 변한다. '안드레아'는 "멋있다"라며 그 바지를 입고 등교한다. 성 정체성과 무관하게, 그는 그냥 그 색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반 아이들은 그를 조롱한다. 밸런타인데이에 절친 '사라'(사라 초카)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안드레아'는 '크리스티안' 무리와 다시 어울린다. 학년말 파티에서 '크리스티안'은 여자 복장으로 오자라는 장난을 제안한다. 어머니의 도움까지 받아 완벽한 의상과 메이크업으로 나타난 '안드레아'. 그러나 그는 혼자였다. 화장실에서 폭행당한 그는 모두 앞에서 공개적으로 망신당한 채 파티장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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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로마에서 안드레아 스페차카테나가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 테레사 마네스는 아들의 페이스북 계정에 접속했다. 그제야 그가 겪은 사이버불링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책 '안드레아: 분홍 바지 너머'를 썼고, 이후 학교를 찾아다니며 사이버불링의 위험성을 알리는 일에 삶을 바쳤다. 마르게리타 페리 감독은 이 자전적 기록을 영화로 옮기면서, '안드레아'의 생생한 삶에 초점을 맞추는 선택을 한다.

페리 감독은 '안드레아'의 자살 장면이나 그 고려 과정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10대 관객을 고려한 현명한 선택이다. 영화는 죽음보다 생의 순간에 집중한다. '안드레아'가 피아노를 치고, '사라'와 영화를 보고, 합창단에서 노래하는 장면들. 그를 스테레오타입화하지 않으려는 노력도 엿보인다. 그는 운동도 좋아하고 책도 읽는, 분홍 바지가 "멋있어서" 입는 평범한 10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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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을 하던 캐릭터가 바뀌는 순간은 곧 영화의 메시지다. 1인칭 화자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안드레아'의 목소리가 사라진 자리를, 어머니 '테레사'가 채운다. 죽음으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 대신, 살아남은 이가 증언자가 되는 과정. 영화는 이탈리아 최초로 기록된 10대 사이버불링 자살 사건을 다루면서, 누가 이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느냐는 윤리적 질문 앞에 섰다. 할리우드에서도 리메이크될 예정이라고.

4813_4983_3353.jpg 사진 = 영화 '마음을 입에 넣고 미소 짓는 것이 두렵다면' ⓒ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2. <마음을 입에 넣고 미소 짓는 것이 두렵다면>

- 섹션 : 뉴 프라이드
- 감독 : 마리 루이즈 레너
- 출연 : 시에나 포포비치, 마리아 매너, 제시카 파 등
- 등급 : 전체 관람가 / 상영시간 : 87분

오스트리아 빈 외곽 플로리츠도르프의 작은 아파트에서 청각장애인 어머니 '이졸데'(마리아 매너)와 함께 사는 12세 '안나'(시에나 포포비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심의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같은 침대를 쓰며 사생활이라곤 없는 좁은 집, 가짜 명품을 빌려 입어야 하는 경제적 처지, 무엇보다 또래와 다른 가정환경은 '안나'를 위축시킨다. 새 학교 친구들은 모두 여유로운 중산층 가정 출신이고, '안나'는 브랜드 옷을 입지 못한 자신과 "지루하게" 입은 급우들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어머니가 산 소파베드는 '안나'에게 처음으로 자기만의 공간을 선물하지만, 동시에 그 비용 때문에 학급 스키 여행에 참여할 수 없게 된다. "몸이 안 좋다"라는 거짓말로 겨우 체면을 유지하는 순간, '안나'는 '가난하다는 것'의 의미를 배운다. 그런 '안나'에게 퀴어 트랜스젠더 아버지(다니엘 시)와 사는 친구 '마라'(제시카 파)는 유일한 동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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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루이즈 레너 감독은 87분 내내 '안나'의 눈높이에 머문다. 체육 수업 전 탈의실에서 "엉덩이가 너무 넓다"라고 수군거리는 급우들의 대화를 듣는 '안나'의 표정, 선의로 수화를 보여달라고 요청한 교사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 '안나'의 당혹감, 어머니가 기차표를 사려다 상대방의 입 모양을 읽지 못해 좌절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안나'의 시선. 이런 장면들은 '계급'이나 '장애'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고도 소녀가 마주한 세계의 불평등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안나'와 어머니의 관계는 이 영화의 정서적 중심이다. '이졸데'는 딸이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천사 같은 인내로 기다리고, '안나'는 학교에서 어머니를 발견하면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한다. 감독은 이런 순간들을 과장하지 않는다. '안나'가 어머니에게 "나가"라고 소리치는 장면도, 숙제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눈물로 끝나는 장면도. 영화는 누구 편도 들지 않는다. 잘못이 있다면 빠르게 사과하고, 오해가 있다면 금세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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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가치는 '평온함' 자체에 있을지도 모른다. 감독은 '안나'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지 않는다. 청각장애인 어머니를 둔 가난한 소녀라는 설정은 눈물을 짜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저 '안나'가 살아가는 조건일 뿐이다. 영화는 "정상"이란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대신 '안나'와 '이졸데', '마라'와 그의 아버지처럼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수치심은 외부에서 부과되는 것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에게 진실하게 사는 것뿐이라는 메시지는 소박하지만 진심이 담겨 있다.

4813_4987_3955.jpg 사진 = 영화 '짐파' ⓒ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3. <짐파>

- 섹션 : 월드 프라이드
- 감독 : 소피 하이드
- 출연 : 올리비아 콜맨, 아우드 메이슨 하이드, 존 리스고 등
-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상영시간 : 113분

호주 애들레이드에 사는 영화감독 '한나'(올리비아 콜맨)는 남편 '해리'(다니엘 헨셜), 16세 논바이너리 자녀 '프란시스'(아우드 메이슨 하이드)와 함께 암스테르담으로 향한다. 그곳엔 '한나'가 13살 때 가족을 떠나 자유로운 삶을 찾아간 게이 아버지 '짐'(존 리스고)이 살고 있다. '짐' 게이 인권 운동가이자 대학교수로 살아온 인물이다. '프란시스'는 할아버지를 '짐파'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영웅처럼 여긴다. 좁은 애들레이드를 벗어나 다양한 퀴어 커뮤니티가 숨 쉬는 암스테르담에서 1년을 살고 싶다는 게 이 여행의 숨겨진 목적이다.

'한나'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소재로 영화를 준비 중이다. '한나'가 투자자와 배우들에게 설명하는 프로젝트는 "갈등이 아닌 친절을 택한" 부모의 이혼 이야기다. '짐'이 커밍아웃한 뒤에도 어머니는 그와 함께 남아 아이들을 키웠고, 서로 다른 관계를 인정하며 가족을 유지했다는 것.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되묻는다. "갈등 없는 드라마가 가능한가?" 이 질문은 영화 <짐파> 자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암스테르담에서 '짐파'는 '프란시스'에게 넓은 세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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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파>는 소피 하이드 감독에게 매우 개인적인 프로젝트다. 2013년 데뷔작 <52번의 화요일>에서 성전환하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다룬 가운데, '프란시스' 역을 맡은 아우드 메이슨 하이드는 감독의 실제 논바이너리 자녀다. 영화를 편집한 브라이언 메이슨은 하이드 감독의 파트너이자 아우드의 부모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가족이 함께 만든 작품인 셈이다. '한나'가 스크린에서 겪는 혼란은 하이드 감독 자신의 허구화된 모습이다.

올리비아 콜맨은 이 영화의 중심이다. '한나'가 '프란시스'를 바라보는 눈빛, 아버지에게 터뜨리지 못하는 분노, 영화 제작자로서의 윤리적 고민이 충분히 전달된다. 여기에 존 리스고는 70대 후반의 나이에 완전한 나체 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짐파'는 매력적이면서도 성가시고, 관대하면서도 편협하다. 한 장면에선 게이 친구들과 'Don't Leave Me This Way'를 열창하며 지나간 전성기를 그리워한다. 또 다른 장면에선 '프란시스'를 지칭하는 대명사를 틀리고 사과하면서도 계속 실수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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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이 영화의 진짜 발견은 아우드 메이슨 하이드다. 전문 배우가 아님에도 두 배우와 나란히 서서 존재감을 잃지 않는다. '프란시스'가 암스테르담 퀴어 씬에서 느끼는 설렘과 환멸, 할아버지에 대한 실망과 애정이 아우드의 눈빛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짐파>는 감독의 용기, 가족이 함께한 제작 과정, 배우들의 헌신, 퀴어 커뮤니티에 대한 존중이 모두 진실한 작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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