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개반이상만 #66] <왼손잡이 소녀>
션 베이커 없는 션 베이커 영화를 본 기분입니다. 정확히는 션 베이커가 연출 없이 각본과 편집으로만 참여한 영화가 얼마나 '션 베이커스러울' 수 있는지를 목격한 시간이었죠. 쩌우스칭 감독의 <왼손잡이 소녀>는 타이틀만 보면 그의 작품이지만, 크레딧을 보면 션 베이커의 손길이 각본과 제작, 편집 전반에 깊숙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영화는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년)를 타이베이로 옮겨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야시장의 네온사인 아래서 뛰노는 다섯 살 '이징'(니나 예)의 모습은 모텔 복도를 달리던 '무니'(브루클린 프린스)와 겹치고, 생계를 위해 발버둥 치는 싱글맘 '슈펀'(자넬 차이)은 '할리'(브리아 비나이트)와 닮았죠.
영화는 싱글맘 '슈펀'과 '슈펀'의 두 딸 '이안'(시 유안 마), '이징'이 타이베이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슈펀'은 야시장에 국수 가게를 열지만 가게 운영은 녹록지 않죠. 임대료는 밀리고, 전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장례비까지 떠안게 됩니다. 20대의 장녀 '이안'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빈랑 가게에서 일하며 유부남 사장과 불륜 관계를 이어가죠. 반항기 가득한 '이안'은 엄마를 향한 원망을 숨기지 않는데요. 아버지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끝까지 돌봐준 엄마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서 다섯 살 '이징'은 야시장을 자신만의 놀이터로 삼죠. 반짝이는 조명과 소음, 온갖 냄새가 뒤섞인 이 공간은 아이의 눈에 원더랜드처럼 보이는데요. 하지만 할아버지(아키오 첸)가 던진 한마디가 '이징'의 세계를 뒤흔듭니다. "왼손은 악마의 손이야. 왼손을 쓰면 악마를 돕는 거야." 천진난만하게 왼손을 써오던 '이징'은 그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나쁜 짓을 할 때는 왼손을 쓰기로 하죠. 어차피 악마의 손이니까. 야시장 곳곳에서 반짝이는 액세서리를 훔치는 것도, 할머니(차오신옌)의 중요한 서류를 몰래 빼내는 것도 모두 왼손의 책임입니다.
할머니의 60번째 생신 잔치가 다가오면서 세 모녀를 둘러싼 갈등이 폭발하는데요. 가부장적 가족 문화 속에서 딸들은 늘 이등 시민이었죠. 아들을 낳지 못한 '슈펀'은 가족 내에서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했고, '이안'은 그런 엄마를 원망하면서도 동시에 자신 역시 같은 억압 구조 안에 갇혀 있음을 깨닫죠. 생신 잔치는 표면적으로는 축하의 자리지만, 실상은 3대에 걸친 여성들의 상처와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전쟁터가 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왼손잡이 소녀>를 보며 가장 먼저 떠오른 건 <플로리다 프로젝트>인데요. 아이의 시선 높이에서 포착한 세계, 가난하지만 생기로 가득한 공간, 경제적 궁핍이 만들어내는 비극과 그럼에도 꺾이지 않는 인간의 존엄. 이 모든 것이 션 베이커 감독이 지난 20년간 천착해 온 주제들이죠. 특히 편집의 리듬감은 션 베이커의 시그니처 그 자체입니다. '이징'이 야시장을 누비며 물건을 훔치는 시퀀스에서 스타카토처럼 끊어지는 컷들은 아이의 심장 박동과 아드레날린을 그대로 전달하죠. 카메라는 '이징'의 뒤를 쫓기도 하고, 앞에서 마주 보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아이폰으로 촬영했다는 사실도 션 베이커의 영향력을 증명하는데요. <탠저린>(2015년) 이후 그는 아이폰이 단순한 대안 장비가 아니라 고유한 미학을 가진 도구임을 계속 입증해 왔습니다. 쩌우스칭 감독 역시 2010년 이 프로젝트를 구상할 때부터 야시장의 생동감을 가장 솔직하게 담아낼 방법으로 아이폰을 선택했는데요. 대형 촬영 장비를 들이밀면 사람들이 의식하고, 현장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깨지죠. 하지만 아이폰은 쇼핑객처럼 위장한 스태프들 사이로 스며들며, 진짜 야시장의 숨결을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왼손잡이 소녀>가 션 베이커의 복제품이 아닌 이유는 쩌우스칭 감독 고유의 정체성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인데요. 대만계 미국인으로서의 경험, 이민자로서의 삶, 가부장제 속에서 자란 기억. "왼손은 악마의 손"이라는 모티프는 실제로 감독의 외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죠. 쩌우스칭 감독은 이를 "너는 너 자신이 될 수 없어"라는 메시지로 해석합니다. 사회적 통제와 체면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위장해야 하는 사람들의 보편적 고통. 왼손잡이가 악마라는 미신은 싱글맘이 낙인찍히고, 대학을 가지 못한 여성이 실패자 취급받는 현실과 겹칩니다.
그렇게 션 베이커 감독이 늘 믿어온 것처럼, 가장 밑바닥에서도 인간은 빛날 수 있고, 가장 힘든 순간에도 춤출 수 있는데요. 쩌우스칭 감독은 그 믿음을 타이베이로 가져와 자신만의 색깔로 다시 칠했죠.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이 '타이베이 프로젝트'입니다. ★★★★
2025/10/30 CGV 용산아이파크몰
※ 영화 리뷰
- 제목 : <왼손잡이 소녀> (Left-Handed Girl, 2025)
- 개봉일 : 2025. 11. 12.
- 제작국 : 대만
- 러닝타임 : 109분
- 장르 : 드라마, 가족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쩌우스칭
- 출연 : 시 유안 마, 자넬 차이, 니나 예, 블레어 창, 차오신옌 등
- 화면비율 : 2.00: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