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개반이상만 #67] <국보>
1964년 나가사키. 펑펑 쏟아지는 눈발 속에서 야쿠자 두목의 아들 '키쿠오'(쿠로카와 소야)는 가부키 공연 '세키노토'에서 '여인' 역을 연기합니다. 공연을 본 가부키 명문가의 당주, '하나이 한지로'(와타나베 켄)는 무대 위 소년을 게이샤로 착각할 만큼 그의 재능에 매료되죠. 하지만 공연이 끝나자마자 반대파의 습격으로 '키쿠오'의 아버지는 아들이 보는 앞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하얀 눈 위에 흩뿌려진 붉은 피. 이 장면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색채 미학의 출발점이자, '키쿠오' 인생의 전환점이 되죠.
1년 후 오사카. '한지로'는 고아가 된 '키쿠오'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아들 '슌스케'(코시야마 케이타츠)와 함께 가부키를 가르치는데요. 혈혈단신 들어온 '키쿠오'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수련합니다. 명문가의 혈통을 타고난 '슌스케'는 여유롭게 무대에 서죠. 두 소년은 형제처럼 자라나지만, 가부키 세계에선 결국 단 하나의 후계자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한지로'가 병으로 쓰러진 날, 그가 후계자로 지목한 건 친아들이 아닌 '키쿠오'(요시자와 료)였죠.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는 그렇게 집을 떠납니다. 이후 영화는 두 남자의 삶을 교차해서 보여주는데요. 재능을 가진 '키쿠오'는 혈통이 없어 추락하고, 혈통을 가진 '슌스케'는 재능의 한계 앞에서 좌절하죠. 두 사람의 운명은 끊임없이 뒤바뀌지만, 결국 돌아오는 곳은 무대입니다. 그들이 진정 사랑한 건 서로도, 가족도 아닌 가부키 그 자체였죠.
이상일 감독은 <국보> 구상에 무려 6년을 쏟았다고 밝혔는데요. "요시다 슈이치의 원작을 책임지는 중압감에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라는 그의 말처럼, 이 영화는 신중하게 설계된 작품입니다. 감독은 "눈을 닮은 흰색은 모든 것을 뒤덮어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만드는 것, 반면 피와 닮은 붉은색은 생명이 깃든 색"이라고 설명했는데요. 가부키 화장도 마찬가지죠. 배우의 얼굴을 흰 물감으로 전부 뒤덮어 배우 자체를 지운 뒤, 그 위에 붉은 화장을 올려 배역의 생명을 집어넣습니다.
흥미로운 건 이상일 감독이 재일교포 3세라는 점인데요. 그는 "혈통과 외부에서 온 인간이라는 영화의 구조는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요소와 겹친다"라고 말했죠.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완전한 내부자가 될 수 없었던 감독 자신의 정체성이 '키쿠오'라는 캐릭터에 투영된 셈인데요. 가장 일본적인 예술인 가부키를 재일교포 감독이 연출했다는 아이러니. 그리고 그 작품이 일본에서 천만 관객을 동원했다는 사실은, 결국 예술 앞에서 국경과 혈통은 의미가 없다는 걸 증명합니다.
<국보>가 포착한 건 예술가의 찬란함이 아니라 그 이면의 그림자인데요. 국보가 되기 위해 '키쿠오'는 연인도, 자식도,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버렸죠. 영화의 주제가 자화자찬할 수 없는 삶을 보여주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키쿠오'는 모든 걸 얻었지만 아무도 곁에 남지 않았죠. 가부키 공연 '소네자키 동반자살'에서 '키쿠오'가 연기한 건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거는 여인이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예술을 위해 사랑을 죽였죠. 마지막 무대 '백로 아가씨'에서 홀로 서는 '키쿠오'의 얼굴엔 완성의 기쁨이 아닌 상실의 슬픔이 어려 있습니다.
3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이 부담스러울 순 있는데요. 하지만 50년이라는 시간을 압축하려면 이 정도의 호흡은 필요해 보입니다. 가부키 무대 장면들은 화려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죠. 소피안 엘 파니의 촬영은 '온나가타'(가부키의 여성 역할을 하는 남성 배우)의 섬세한 손끝 움직임부터 무대 전체를 채우는 압도적인 스케일까지 놓치지 않습니다.
일본 천만 영화라는 흥행 기록보다 중요한 건,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인데요. 예술가로 산다는 건 무엇인가? 최고가 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대가로 잃는 것들은 정당한가? <국보>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키쿠오'의 대사 "참으로 아름답구나"는 예술에 대한 찬사인 동시에 자신의 인생에 대한 자조처럼 들리죠. 이상일 감독이 6년을 고민하며 완성한 건 승리의 서사가 아니라 고독의 기록이 됐습니다. ★★★★
2025/11/13 CGV 용산아이파크몰
※ 영화 리뷰
- 제목 : <국보> (Kokuho, 2025)
- 개봉일 : 2025. 11. 19.
- 제작국 : 일본
- 러닝타임 : 175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이상일
- 출연 : 요시자와 료, 요코하마 류세이, 타카하타 미츠키, 테라지마 시노부, 모리 나나 등
- 화면비율 : 2.39: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