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개반이상만 #68] <콘티넨탈 '25>
※ 영화 '콘티넨탈 '25'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콘티넨탈 '25> 속에서 '오르솔랴'(에즈터 톰파)가 걷는 숲길 곁에는 낡은 기계 공룡들이 서 있습니다. 기계음을 내며 입을 벌리는 이 싸구려 테마파크의 잔해들은 한때 지구를 지배했다가 멸종한 존재들의 초라한 재현이죠.
라두 주데 감독은 이 공룡 앞에 있는 '오르솔랴'의 모습을 보여주며 냉소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시스템 앞에서 무력한 개인의 양심이란, 결국 이 기계 공룡처럼 껍데기만 남은 박제품이 아닐까요?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각본상)을 받은 <콘티넨탈 '25>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한 여성의 반복적 고백을 통해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어떻게 개인의 양심을 무력화시키는지를 보여줍니다.
영화의 첫 10여 분은 주인공조차 등장하지 않는데요. 대신 카메라는 낡은 옷을 걸친 중년 남성 '이온'(가브리엘 스파히우)의 뒤를 묵묵히 쫓습니다. 그는 클루지 외곽의 낡은 공원에서 쓰레기를 줍죠. 페트병과 캔을 모아 돈으로 바꾸고,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구한다며 손을 내밉니다. 대부분은 그를 외면하지만, 가끔 누군가 몇 푼을 건네죠. '이온'은 알아듣기 힘든 중얼거림을 계속하며 도시 곳곳을 배회합니다.
이 장면들은 일체의 설명 없이 관찰자의 시선으로만 제시하는데요. 라두 주데 감독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싸이코>(1960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싸이코>가 초반 주인공을 죽이고 다른 인물로 초점을 옮기듯, <콘티넨탈 '25> 역시 관객이 '이온'에게 감정을 이입하기 시작할 무렵 그를 죽음으로 내몬 뒤 진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죠.
하루 종일 거리를 헤맨 '이온'은 어느 낡은 건물의 지하 보일러실로 돌아옵니다. 여기가 그의 집인데요. 독일 부동산 투자회사가 이 건물을 사들여 '콘티넨탈'이라는 부티크 호텔로 재개발할 예정이고, '이온'은 무단 점유자로 분류되어 퇴거 명령을 받은 상태죠. 어느 날 아침,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깬 '이온'은 법원 집행관 '오르솔랴'와 무장 경찰들을 마주합니다.
'오르솔랴'는 '이온'에게 지금 당장 이곳을 비워야 한다고 통보하는데요. 쉼터를 알아봐 주겠다고, 짐을 옮길 차량도 준비했다고 말하죠. '이온'은 쉼터는 싫다고,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애원합니다. '오르솔랴'는 20분을 주고, 경찰들과 밖으로 나가 커피를 마시는데요. 20분 뒤 돌아왔을 때, 그들이 발견한 것은 라디에이터에 철사 줄을 걸어 목을 맨 '이온'의 시신이었죠.
이 사건 이후 영화는 '오르솔랴'가 주변 사람들을 만나며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구조로 전개됩니다. '오르솔랴'는 상사에게, 남편에게, 친구에게, 엄마에게, 옛 제자에게, 사제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하죠. 보일러실의 오줌 냄새, 라디에이터에 걸린 철사, '이온'의 부풀어 오른 눈. 매번 '오르솔랴'는 "법적으론 문제없다는 걸 알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매번 똑같은 대답을 듣죠. "당신 잘못이 아니야." 이 반복 자체는 주데 감독의 의도인데요. '오르솔랴'의 고백은 진정한 참회라기보다 자기 위안을 위한 의례에 가깝죠.
친구 '도리나'(오아나 마르다레)와의 대화도 흥미로운데, '도리나'는 자신의 아파트 단지에 나타나는 노숙자 이야기를 꺼내죠. 그 남자가 불쌍하긴 한데, 복도에 배설하는 냄새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도리나'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곳에 기부하는지 자랑하죠. 이 장면에서 주데 감독은 현대인의 위선을 냉정하게 해부하는데요. 멀리 있는 전쟁 희생자들에겐 2유로씩 기부하면서, 바로 옆 노숙자는 냄새난다며 쫓아내는 모순 말이죠. 양심은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몇 번의 클릭으로 해소되는 상품이 되었습니다.
엄마(안나마리아 빌루스카)와의 대화는 더 극단적인데요. '오르솔랴'의 엄마는 헝가리계로, 루마니아가 100여 년 전 클루지와 트란실바니아를 헝가리로부터 빼앗아 갔다는 역사적 원한을 여전히 품고 있죠. '오르솔랴'가 '이온'의 죽음을 이야기하자, 엄마는 대화를 '오르반 빅토르'의 헝가리가 얼마나 훌륭한지로 돌려버립니다. '오르솔랴'가 오르반 정부를 파시스트라고 비판하자, 엄마는 격분하며 딸을 "창녀"라고 부르며 집 밖으로 쫓아내죠. 민족주의와 역사적 트라우마는 가족 관계마저 파괴한 것입니다.
술에 취한 '오르솔랴'는 우연히 만난 옛 제자 '프레드'(아도니스 탄차)를 다시 찾아가는데요. 남편과 아이들은 그리스로 가족여행을 떠났고, '오르솔랴'는 혼자 클루지에 남았죠. '프레드'는 법학을 공부했지만, 지금은 음식 배달 라이더로 일하는데요. 그의 배달 가방에는 "나는 루마니아인"이라는 LED 글자가 깜빡이죠. '프레드'는 방글라데시나 스리랑카 출신 배달원들은 인종차별적인 운전자들에게 치이곤 하니까, 자신이 루마니아인임을 명시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프레드'는 자신이 선불교에 심취해 있다며 온갖 선문답을 늘어놓습니다. '오르솔랴'는 진지하게 듣는 척하지만, 사실 '프레드'의 관심사는 다른 데 있었죠. 술에 취한 두 사람은 결국 야외에서 섹스를 합니다. 주데 감독은 이 장면을 냉담하게 처리하죠. 카메라는 두 사람의 몸을 멀리서 비추고, 옆에는 '프레드'의 배달 가방이 놓여 있는데요. "나는 루마니아인"이라는 글자가 어둠 속에서 깜빡이죠. 양심의 위기를 철학적 깨달음이나 육체적 위안으로 해소하려는 시도는 결국 또 하나의 허무한 몸짓일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르솔랴'는 정교회 사제(세르반 파블루)를 찾아가는데요. 사제는 세련되고 권위적인 태도로 자살은 죄인 본인의 책임이며, '오르솔랴'는 아무런 죄가 없다고 단언하죠. 신의 섭리를 운운하며, 이 사건을 신앙으로 돌아오는 계기로 삼으라고 조언합니다. 오르솔랴의 죄책감은 사제에게 신자 한 명을 더 확보할 기회일 뿐인데요. 모든 대화가 끝난 뒤, '오르솔랴'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합니다.
주데 감독은 각 대화 시퀀스 사이사이에 클루지의 건축물들을 고정 카메라로 담아내죠. 아이폰으로 촬영된 이 장면들에는 아무런 음악도, 해설도 없는데요. 감독은 "루마니아는 사회주의 붕괴 이후 극단적인 시장만능주의로 전환했다. 과거 비밀경찰 출신들이 부동산 재벌이 되었고, 주거권은 투자 상품이 되었다"라면서, '이온'이 죽은 보일러실 자리에 들어설 '콘티넨탈' 호텔은 이 모든 모순의 상징이라고 밝혔는데요.
'오르솔랴'의 죄책감은 몇 주 후면 잊힐 것이고, 언론의 선정적 보도도 다른 뉴스에 묻힐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이처럼 주데 감독은 관객에게 감정 이입을 유도하기보다, 거리를 두고 상황을 분석하도록 만들죠. '오르솔랴'의 고백이 반복될수록 관객은 '오르솔랴'의 진정성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오르솔랴'는 정말 '이온'의 죽음을 슬퍼할까요? 아니면 자기 자신이 착한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고 싶은 것일까요? ★★★☆
2025/05/03 CGV 전주고사
-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JIFF) 상영작
※ 영화 리뷰
- 제목 : <콘티넨탈 '25> (Kontinental '25, 2025)
- 개봉일 : 2025. 11. 19.
- 제작국 : 루마니아
- 러닝타임 : 109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라두 주데
- 출연 : 에즈터 톰파, 가브리엘 스파히우, 아도니스 탄차, 오아나 마르다레, 세르반 파블루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