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30] <한란>
하명미 감독의 <한란>은 제주 4·3이라는 거대한 비극을 다루면서도 절망의 서사로만 흐르지 않는다. 1948년 제주, 토벌대를 피해 한라산으로 피신한 스물여섯 살 엄마 '아진'(김향기)과 여섯 살 딸 '해생'(김민채)의 생존 여정을 따라가며, 영화는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도 살아남으려는 의지가 얼마나 강렬한 빛을 발하는지 보여준다. 한라산의 깊은 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난초처럼, '아진'과 '해생'은 꺾이지 않는다. 그들의 생존기는 저항이고, 그 자체로 증언이다.
영화는 '아진'이 남편을 찾아 산으로 오르며 딸과 생이별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군인들이 아이와 노인은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해생'을 시어머니와 마을에 남겨둔 '아진'의 선택은, 곧 참혹한 현실 앞에서 산산조각 난다. 토벌대는 마을 사람들을 무차별하게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운다. 할머니가 죽는 모습을 목격한 '해생'은 숟가락 세 개와 밥그릇, 콩을 챙겨 홀로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마을이 전소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진' 역시 모든 것을 무릅쓰고 딸을 찾아 하산한다.
서로를 향해 가는 모녀의 발걸음은, 죽음이 일상이 된 세계에서도 사랑이 어떻게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지 묵직하게 전한다. 극적으로 재회한 모녀는 안도할 겨를도 없이 다시 토벌대에게 쫓긴다. 동굴에 숨고, 산을 넘고, 바다로 향하는 과정은 생존 그 자체가 투쟁임을 보여준다. '아진'이 '해생'에게 "우리는 해녀니까 바다가 집"이라며 두려움을 감추는 장면은, 엄마라는 이름으로 강해져야 했던 수많은 여성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하명미 감독은 시나리오를 완성하자마자 가장 먼저 김향기를 떠올렸다고 밝혔다. "'아진'의 슬픔과 내면을 동시대 배우 중 가장 깊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었다"라는 감독의 말처럼, 김향기는 그 믿음에 온전히 화답한다. <신과함께> 시리즈나 <증인>(2019년)에서 보여준 섬세한 감정 연기는 이미 검증되었지만, <한란>의 김향기는 차원이 다르다. 스물여섯 살 엄마라는 역할 자체가 그에게는 일종의 모험이었을 텐데, 김향기는 주저 없이 1948년 제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촬영 3개월 전부터 제주어를 준비했다는 김향기의 노력은 스크린 위에서 완벽하게 구현된다. 제주 현지인들로부터 "완벽에 가깝다"라는 평가를 받았다는 김향기의 제주어는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언어가 아니라 감정의 결이다. 딸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순간의 결연함, '해생'과 재회했을 때의 안도와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 끝까지 살아남겠다는 의지가 담긴 눈빛. 김향기는 대사가 아닌 존재 자체로 '아진'을 살아냈다.
김민채 역시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준다. 대사량이 많지 않음에도 김민채의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할머니의 죽음을 목격하고도 야무지게 생존 도구를 챙기는 장면, 혼자 산을 오르며 엄마를 찾는 장면, 엄마와 재회한 뒤 보여주는 모녀 케미스트리까지. 하명미 감독은 "김민채 배우가 보여준 '해생'은 시나리오를 뛰어넘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라고 회상했는데, 그 말이 과장이 아님을 영화는 증명한다.
<한란>의 가장 큰 미덕은 절제된 연출이다. 하명미 감독은 감정에 호소하거나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는다. 학살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비극의 무게는 오롯이 전달된다. 불타는 마을, 흩어진 물건들, 사람들의 비명 소리. 영화는 폭력을 재현하는 대신 그 여파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엄혜정 촬영감독과 함께 구현한 빈티지한 영상미는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 안에서 벌어진 참혹한 비극을 병치시키며,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또한, 토벌대와 무장대가 서로에게 총을 겨누지만, 영화는 그들 각자가 느끼는 혼란과 두려움도 외면하지 않는다. '문 일병'(김원준) 역시 명령에 따라 총을 들었지만 죄 없는 사람들이 죽는 모습에 괴로워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여기에 100% 제주어로 진행되는 영화는 사라져가는 언어의 아름다움을 되살리려는 시도도 보여준다. 공식 감수자만 다섯 명, 비공식까지 합치면 열 명에 이르는 이들이 참여해 1948년 당시의 옛 제주어를 복원해냈다. 후반작업 단계에서는 스태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임시 자막을 삽입할 정도였다고.
한편, <한란>의 마지막 장면은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떠올리게 만든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3년)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의 일상을 담으며 직접적인 학살 장면 없이 홀로코스트의 공포를 전달한 뒤, 마지막에 현재의 박물관과 희생자들의 유품을 보여주며 충격을 안겼다면, <한란> 역시 비슷한 구조를 취한다. 영화 내내 '아진'과 '해생'이라는 두 개인의 생존기를 따라가던 관객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4·3 평화공원의 비석들 앞에서 멈춰 선다.
영화 속 '아진'과 '해생'은 그 수많은 이름 중 하나였을 뿐이다. 우리가 118분 동안 따라간 절박한 생존의 기록이, 실은 당시 제주에서 반복되었던 무수한 비극 중 하나였다는 사실. 픽션 속 두 모녀의 이야기는 여기서 집단적 희생의 규모로 확장되며, 관객에게 역사적 책임감을 환기한다. 이것은 개별 서사에서 역사적 실재로의 이행이며, 영화적 감정을 넘어선 각성의 순간이다.
<한란>은 분명 의미 있는 영화다. 제주 4·3을 다룬 극영화가 여전히 불모지에 가까운 상황에서, 여성의 시선으로 이 역사를 밀도 있게 다룬 시도 자체가 귀하다. 김향기와 김민채의 연기는 흠잡을 데 없고, 제주의 자연을 담아낸 영상미도 탁월하다. 담담한 연출 톤은 자칫 선정적으로 흐를 수 있는 소재를 품위 있게 다루는 데 성공했다. ★★★
2025/11/12 CGV 용산아이파크몰
※ 영화 리뷰
- 제목 : <한란> (Halllan, 2025)
- 개봉일 : 2025. 11. 26.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119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하명미
- 출연 : 김향기, 김민채, 황정남, 김원준, 최승준 등
- 화면비율 : 2.39: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