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독립영화제에서 만난 보석 같은 영화들

[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31] 51회 서울독립영화제 감상 영화

by 양미르 에디터
4863_5149_3312.jpg 사진 = 51회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식 ⓒ 서울독립영화제

독립영화의 한 해를 결산하는 51회 서울독립영화제(SIFF2025, 집행위원장 모은영)가 지난 11월 27일 CGV압구정에서 개막식을 열고 9일간의 일정에 돌입했다. 올해 슬로건 ‘영화가 오려면 당신이 필요해(For Films to Come, We Need You)’는 영화가 관객과의 만남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의미를 담아, 영화제가 관객의 가치를 중심에 두고 있음을 강조한다. SIFF2025는 역대 최다 편수인 167편의 작품을 상영하고, 상금 역시 최대 규모인 총 1억 2,700만 원을 편성해 창작자 지원의 외연을 넓혔다. 몇몇 작품을 관람한 에디터의 후기를 올린다.

4863_5150_3426.jpg 사진 = 영화 '이반리 장만옥' ⓒ (주)인디스토리

1. <이반리 장만옥>

- 섹션 : 페스티벌 초이스 장편 쇼케이스
- 감독 : 이유진
- 출연 : 양말복, 성재윤, 박완규 등
-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상영시간 : 108분

중년 레즈비언 '만옥'(양말복)은 서울에서 퀴어바 '레인보우'를 운영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일궈왔다. 그곳은 소수자들이 숨죽이지 않고 웃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었고, '만옥'은 그 중심에서 누구보다 당당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만옥'은 오래전 떠나왔던 고향, '이반리'로 다시 불러들인다. 가게 문을 닫고 내려간 시골 마을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도시보다 더 견고한 편견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반리'에서 '만옥'을 기다리고 있던 건 과거의 상처들이었다. 현재 마을 이장으로 군림하는 전 남편(박완규)은 '만옥'의 존재 자체를 불편해하고,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다. '만옥'이라는 존재는 그들이 애써 외면해 온 '다름'을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옥'은 물러서지 않는다. 오히려 '만옥'은 이장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한다. 자신을 숨기며 살아온 세월에 종지부를 찍고, 이 마을에서 자신의 자리를 당당히 만들어내겠다는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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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에서 '만옥'은 옛 연인 '금자'(김정영)를 다시 만나고, 자신의 정체성을 숨긴 채 숨죽여 살아가던 고등학생 '재연'(성재윤)과도 마주한다. '재연'은 거리낌 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만옥'을 보며 처음으로 자기 삶의 윤곽을 그릴 수 있었다. 세상 어딘가에 자신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숨지 않고 당당하게 서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재연'에게는 용기가 된다. 이유진 감독은 연출 의도에서 "코로나 이후 극장에서 친구, 가족, 연인과 함께 갇혀 다 같이 웃고 떠들고 즐길 수 있는 대중 코미디 퀴어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이 말에는 퀴어 영화가 늘 무겁고 진지한 톤으로만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관습에 대한 저항이 담겨 있다. 퀴어의 삶 역시 웃음과 유머,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으로 채워져 있는데, 왜 스크린 위에서는 늘 고통과 비극으로만 재현되어야 하는가? 감독의 이런 문제의식은 영화 전반에 걸쳐 경쾌한 리듬감과 유머로 발현된다. 차별과 편견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영화는 관객을 억지로 숙연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만옥'과 '만옥'의 친구들이 펼치는 선거 운동은 마치 축제처럼 유쾌하고, 그 와중에도 날카로운 메시지는 관객의 가슴에 정확히 꽂힌다.

4863_5152_352.jpg 사진 = 영화 '리틀 아멜리' ⓒ (주)영화사 진진

2. <리틀 아멜리>

- 섹션 : 해외초청
- 감독 : 메일리스 발라데, 리안 조 한
- 목소리 출연 : 루이즈 샤르팡티에, 빅토리아 그로부아, 레티시아 코린 등
- 등급 : 전체 관람가 / 상영시간 : 78분

1970년대 일본 고베, 벨기에 외교관 가정의 막내딸 '아멜리'(루이즈 샤르팡티에 내레이션/에밀루 홈스 목소리)는 태어난 지 2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의사는 "식물 상태"라는 진단을 내리고, 가족들은 조용히 그 아이를 지켜볼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벨기에에서 찾아온 할머니(캐시 세르다 목소리)가 건넨 화이트초콜릿 한 조각이 '아멜리'를 깨운다. 세상에 눈을 뜬 '아멜리'는 갑자기 완벽한 문장으로 말하기 시작하고, 첫 단어는 '엄마'도 '아빠'도 아닌 '진공청소기'다.

사물을 빨아들여 사라지게 만드는 그 기계가, 아이의 눈에는 신처럼 보였다. '아멜리'는 자신 역시 신이라고 믿는다. 아니, 정확히는 '튜브'다. 음식을 삼키고 배출하는, 세상을 관찰만 할 뿐 개입하지 않는 존재. 하지만 일본인 가정부 '니시오'(빅토리아 그로부아 목소리)를 만나면서 '아멜리'의 세계는 조금씩 확장되기 시작한다. '니시오'는 '아멜리'를 아이 취급하지 않는다. '니시오'는 '아멜리'의 눈높이에 몸을 낮춰 세상을 함께 바라보고, 진지한 질문에는 진지하게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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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리스 발라데와 리안 조 한 감독은 아멜리 노통브의 자전적 소설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을 각색하며, 아이의 시선을 시각 언어로 번역하는 데 집중했다. 그래서 영화는 명확한 윤곽선을 지우고, 수채화처럼 번지는 색채로 세상을 그려낸다. '아멜리'의 눈에 비친 일본은 벚꽃과 잉어 모양 바람 양말, 강에 떠내려가는 등불로 가득한 환상의 나라다. 하지만 동시에 전쟁의 그림자가 여전히 드리워진, 상처받은 어른들의 땅이기도 하다.

일본 전통 신앙에서 아이는 7세까지 '오코사마(lord child)', 즉 신의 영역에 속한 존재로 여겨진다. 인지 능력이 발달하면서 점차 인간 세계로 내려오는 것이다. '아멜리'가 자신을 신이라 믿는 설정은 허황된 상상이 아니라, 일본 문화 안에서는 자연스러운 관념이다. 이처럼, 일본과 벨기에, 전쟁과 평화,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3살 아이의 눈높이에서 풀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영화는 그 도전에 응답하며, 기억이란 결국 감각의 파편들이 만들어낸 인상화임을 보여준다.

4863_5154_366.jpg 사진 = 영화 '힌드의 목소리' ⓒ 찬란

3. <힌드의 목소리>

- 섹션 : 해외초청
- 감독 : 카우타르 벤 하니야
- 출연 : 사자 킬라니, 모타스 말히스, 클라라 코우리 등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상영시간 : 89분

2024년 1월 29일, 가자지구 텔 알 하와 지역에서 여섯 살 힌드 라잡은 삼촌 가족과 함께 피란길에 올랐다. 이스라엘군의 대규모 공격이 가자 시티를 덮치자 대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차량은 400미터도 채 가지 못하고 탱크의 포격을 받았다. 오후 1시경, 열다섯 살 사촌 언니가 팔레스타인 적신월사에 긴급 전화를 걸었다. "우리를 쏘고 있어요." 총성이 들리고, 비명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적신월사가 다시 연락했을 때 전화를 받은 건 힌드였다.

"너무 무서워요. 구하러 오고 있죠?" 차 안에는 죽은 가족들의 시신이 있었고, 탱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후 5시 40분, 적신월사는 이스라엘 국방부 팔레스타인 민사기구 코가트(COGAT)와 사전 조율을 마치고 구급차를 출동시켰다. 구급차는 힌드가 있는 곳에서 8분 거리에 있었다. 오후 6시, 구급차와 연락이 끊겼고 곧이어 힌드와의 통화도 두절됐다. 12일 후, 힌드와 구급대원 유세프 자이노, 아메드 마드훈은 불과 50미터 떨어진 곳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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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테르 벤 하니아 감독은 이 70분간의 실제 통화 기록을 영화의 중심축으로 삼았다. 벤 하니아 감독은 전작 <올파의 딸들>(2023년)에서 연극 치료 세션을 통해 실제 가족의 트라우마를 재구성했던 방식을 한층 극단적으로 밀어붙인다. 배우들이 적신월사 직원들을 연기하지만, 힌드와 라얀의 목소리는 2024년 1월 29일 그날의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힌드의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 화면에는 음파 그래프와 파일명 '240129.WAV'만 표시된다. 어떤 시각적 재현도, 어떤 상상된 이미지도 개입하지 않는다. 이 선택은 희생자의 마지막 순간을 함부로 형상화하지 않겠다는 윤리적 선언이자, 목소리 자체가 지닌 증언의 힘을 극대화하는 연출이다.

구스타브 몰러 감독의 <더 길티>(2018년)가 장르영화의 긴장감으로 사회적 질문을 던졌다면, <힌드의 목소리>는 그 구조를 가져와 현실의 비극 앞에 놓는다. 적신월사 긴급 콜센터는 유리 칸막이와 데스크탑 컴퓨터, 헤드셋이 놓인 평범한 사무실이다. 영화는 극한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감정을 조작하지 않는다. 벤 하니아 감독은 힌드의 목소리가 흐를 때 어떤 극적 음악도 깔지 않는다. 재연된 장면들은 의도적으로 극적이지 않다. 형광등 불빛 아래 지친 얼굴들, 떨리는 손, 흐트러진 머리카락. 배우들은 절제된 연기를 통해 실제 직원들이 겪었을 무력감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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