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 소녀가 무너뜨린 '물물교환 아파트' 독재

[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33] <콘크리트 마켓>

by 양미르 에디터
4874_5183_651.jpg 사진 = 영화 '콘크리트 마켓' ⓒ 롯데엔터테인먼트

2023년 여름,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 이후 홀로 남은 황궁 아파트를 무대로 인간의 윤리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차갑게 해부했다. '영탁'(이병헌)이라는 평범한 남자가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지, '민성'(박서준)과 '명화'(박보영) 부부가 생존과 양심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 지켜보는 122분은 관객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의 무게가 작품을 단단하게 지탱했다.


2024년 1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황야>는 같은 '황궁 아파트'를 배경으로 삼았지만, 전혀 다른 영화였다. 마동석이라는 배우 한 명의 존재감에 모든 것을 걸었고, 세계관은 액션의 무대로 전락했다. 납치된 소녀를 구하는 사냥꾼 '남산'(마동석)의 이야기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옷을 입었을 뿐, 그 안은 비어 있었다. 글로벌 넷플릭스 1위라는 성과와 별개로, 작품이 제시하는 세계는 설득력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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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콘크리트 마켓>이 극장을 찾았다. 홍기원 감독의 상업 영화 데뷔작이자, 이재인과 홍경이라는 젊은 배우들이 중심이 된 작품. 이번에는 '황궁 아파트'가 물물교환 시장으로 변모한다. 통조림이 화폐가 되고, 층별로 위계질서가 형성된 이곳에서 18세 소녀 '희로'(이재인)가 독재자 '박상용'(정만식)을 무너뜨리려는 계획을 실행한다. 참신한 발상이었고, 10대 중심의 서사라는 차별점도 분명했다. 하지만 완성된 작품을 보고 나면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구축했던 밀도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지진 이후 세상은 무너졌지만, '황궁 아파트'만은 홀로 서 있다. 생존자들이 모여들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곳에는 '황궁마켓'이라는 독특한 경제 시스템이 자리 잡는다. 1층부터 9층까지 층별로 업종이 나뉘고, 현금 대신 통조림 햄이 화폐 역할을 한다. 식량, 연료, 약품, 심지어 성매매까지 모든 거래가 통조림으로 이루어진다. 마켓의 정점에는 '박상용'이 있다. 우연히 약품을 손에 넣게 된 그는 생존에 필수적인 자원을 독점하며 절대 권력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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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용'의 수하로는 두 명의 수금조가 있다. 왼팔 '김태진'(홍경)과 오른팔 '박철민'(유수빈). 이들은 매일 상인들에게서 통조림을 수금해 '상용'에게 상납하며 서로 경쟁한다. '태진'은 '상용'에게 목숨을 구해진 빚이 있어 충성하고, '철민'은 야망을 감추지 않으며 언젠가 마켓을 차지하려 한다. 이 견고한 질서 속에 어느 날 '희로'가 나타난다.

'희로'는 통조림을 훔치기 위해 마켓에 숨어들었다가 우연히 '상용'의 비밀을 알게 된다. 그가 독점하고 있는 약품의 실체, 그리고 '희로'의 친구 '세정'(최정운)의 죽음과 연결된 진실. 복수를 결심한 '희로'는 '태진'을 찾아가 거래를 제안한다. "여기 주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해 본 적 없어?" 서로를 믿을 수 없지만 각자의 목적을 위해 두 사람은 손을 잡는다. '희로'는 통조림의 가치를 조작해 마켓의 경제 시스템을 흔들고, '태진'은 그 혼란 속에서 '상용'을 제거할 기회를 노린다. 하지만 '철민' 역시 이 틈을 노리고 있고, 세 사람의 거래와 배신이 교차하면서 '황궁마켓'의 질서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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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원 감독은 "문명이 붕괴된 이후에도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룰'을 만들고, 그 안에서 새로운 질서가 생겨난다. 이 영화는 생존 이후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재난 그 자체가 아니라 재난 이후 형성된 사회 구조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통조림 화폐 시스템, 층별 위계질서, 복합 쇼핑몰처럼 운영되는 마켓이라는 설정은 분명 흥미롭다.

문제는 이 세계관을 지탱하는 서사의 밀도다. 오랫동안 마켓을 지배해온 '박상용'이라는 인물은 독재차지고는 위협이 부족하다. 정만식이 캐릭터를 "조금 더 친숙한 악마, 현실에서 본 적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듯 입체적인 악인을 구축하려 했으나, '박상용'은 정상에 군림하기보다는 그 아래에서 움직이는 인물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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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로'가 실행하는 계획 역시 논리적 빈틈이 크다. 통조림의 가치를 조작한다는 발상은 흥미롭지만, 그것만으로 수년간 유지된 독재 체제가 무너진다는 전개는 설득력이 약하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영탁'이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이 디테일하게 그려졌다면, 이 작품에서 '상용'의 몰락은 지나치게 쉽게 이루어진다. 악역이 허무하게 무너지면 위기는 예상 가능한 선에서 머물고, 긴장감은 사라진다.

이어 감독은 "재난 이후에도 정체성을 찾지 못한 10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려 했다"라고 밝혔다. 10대 중심 서사는 분명 차별점이다. 어른들의 보호 없이 스스로 살아남아야 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다른 아포칼립스 작품들과 구분되는 지점이었다. 그러나 영화 속 10대들은 주체적이기보다는 상황에 떠밀리는 인물로 그려진다. 후반부에 '희로'가 "학교를 세우자"라고 말하는 장면은 생존 이후의 인간다움을 환기하려는 의도였겠지만, 그 메시지가 충분히 축적되지 못한 상태에서 던져진 말은 공허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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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마켓>은 당초 7부작 드라마로 기획되었다가 122분 극장판으로 재편집된 작품이다. 그래서 122분 내내 '황궁마켓'을 누빈 후 극장을 나서면, 흥미로운 시도였지만 아쉬움이 더 크게 남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콘크리트 유니버스'의 확장 가능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세트장만 공유하는 호부호형 같은 관계로는 진정한 유니버스를 만들 수 없다. 세계관의 외연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안을 채우는 이야기의 깊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콘크리트 마켓>은 보여준다. ★★★

2025/12/01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 영화 리뷰
- 제목 : <콘크리트 마켓> (Concrete Market, 2025)
- 개봉일 : 2025. 12. 03.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122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홍기원
- 출연 : 이재인, 홍경, 정만식, 유수빈, 김국희 등
- 화면비율 : 2.00: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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