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없는 것 같다며 부끄러워한 작가의 겨울 여행

[별세개반이상만 #71] <여행과 나날>

by 양미르 에디터

대학 강당의 스크리닝이 끝나고 Q&A 시간. 관객석에서 한 학생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라며 손을 듭니다. 각본가 '이'(심은경)는 무대 위에서 몸을 움츠리죠. 자신의 작품에 대한 소감을 묻는 질문에 '이'는 재능이 없는 것 같다는 답을 합니다. 화면에는 방금 전까지 상영되던 '이'의 영화가 있었는데요. 여름날 해변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가 폭우 속에서 함께 수영하는, 아름답고도 불안한 이야기. 객석 한쪽에 앉은 노교수는 그 영화를 "섹시하다"라고 평했지만, 정작 창작자 본인은 자신이 만든 세계 앞에서 얼굴을 붉힙니다.

미야케 쇼 감독의 <여행과 나날>은 이 부끄러움에서 출발하죠. 자신이 쓴 이야기가 스크린 위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을 지켜보는 창작자의 민망함. 그 민망함은 비단 예술적 완성도에 대한 회의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내밀한 세계가 타인의 눈앞에 펼쳐진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노출감에 가깝죠. '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나는 '말'이라는 틀에 갇혀 있다. 여행이란 말에서 도망치려는 행위일지도 모른다"라는 '이'의 독백처럼, 언어로 세계를 재단하는 일에 지쳐버린 사람의 탈출이죠.


4886_5223_4311.jpg 사진 = 영화 '여행과 나날' ⓒ 엣나인필름


<여행과 나날>은 츠게 요시하루의 만화 '해변의 서경'과 '혼야라동의 벤상'을 원작으로 여름과 겨울이라는 두 계절을 교차합니다. 전반부 약 35분은 '이'가 쓴 각본 속 이야기인데요. 어느 여름날, 인적 드문 해변에 나타난 여자 '나기사'(카와이 유미)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중 '나츠오'(타카다 만사쿠)를 만나죠.

소년은 어릴 적 바다에서 익사한 모자의 시신을 목격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요. "무서웠다"라는 '나츠오'의 말에 '나기사'는 "무섭기보다는 슬픈 이야기 같다"라고 답하죠. 둘은 다음 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태풍이 몰아치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해변에 나타나 함께 바다에 뛰어듭니다. 빗줄기가 쏟아지는 폭풍우 속, 카메라는 파도에 휩쓸리며 두 사람의 얼굴을 따라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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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이야기가 끝나고 우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옵니다. 스크리닝 이후 '이'는 은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마주하고, 새로운 각본 작업은 좌초하죠. 닌자에 관한 이야기를 쓰려 했지만, 한 줄도 진척이 없었고, 그렇게 '이'는 기차를 탑니다. 긴 터널을 지나자 창밖으로 설국이 펼쳐지죠. '이'는 마을의 호텔들을 전전하다 모두 만실이라는 답을 듣고, 결국 산속 깊은 곳의 낡은 여관을 찾아가는데요.

그곳의 주인 '벤조'(츠츠미 신이치)는 예약도 없이 찾아온 손님을 의아한 눈빛으로 맞이하지만 내쫓지는 않습니다. '벤조'는 '이'의 직업을 알게 되면서, 영화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늘어놓죠. "좋은 작품은 얼마만큼 인간의 슬픔을 그려내느냐에 달렸다"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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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케 쇼 감독이 심은경을 캐스팅하면서 원작의 설정을 크게 바꿨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데요. 츠게 요시하루의 만화 '혼야라동의 벤상'에서 여관을 찾아온 '이'는 일본인 남성 만화가였죠. 감독은 이 인물을 한국인 여성 각본가로 전환했는데요. 모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연기하면서 느꼈던 부족함, 자신의 작품이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될지에 대한 불안. 심은경이 경험해 온 이 감정들이 각본가 '이'의 고민과 정확히 맞물리죠. 영화 속 '이'가 한국어로 일기를 쓰고 내레이션을 남기는 설정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하는데요. '이'는 일본에서 일본어로 창작 활동을 하지만, 가장 내밀한 생각은 여전히 모국어로 정리하죠.

여기에 영화를 보는 내내 화면 비율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정상입니다. <여행과 나날>은 1.37:1이라는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아카데미 비율을 채택했는데요. 이는 1930~1950년대 할리우드 영화의 표준이었지만 와이드스크린 포맷이 등장하면서 사라진 화면 비율이죠. 미야케 쇼 감독은 "나에게는 아카데미 비율이 가장 아름답고 이상적인 비율"이라며, "영화사에서 비율의 기준점이자 내 작품과 가장 잘 어울리는 프레임"이라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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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택은 영화의 미학과 직결하는데요. 넓은 해변이나 광활한 설원을 담을 때 와이드 화면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자연의 장엄함으로 관객을 압도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뜻이죠. 대신 미야케 쇼 감독은 한 사람과 그가 서 있는 세계의 관계에 집중합니다. 프레임이 좁을수록 시선은 더 깊어지는데요. 해변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 설원 위를 걷는 '이'의 뒷모습, 여관 방 안에서 '벤조'와 마주 앉은 밤의 정경. 이 모든 순간이 위아래로 탁 트인 화면 안에서 마치 한 장의 사진처럼 정갈하게 담깁니다.

그렇게 <여행과 나날>이 궁극적으로 다루는 것은 창작의 본질에 관한 질문인데요. 미야케 쇼 감독은 5년에 걸쳐 이 영화의 각본을 썼죠. 그는 "두 편의 영화를 찍은 후에서야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길이 보였다. 각본가인 나를 투영해 등장시키면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해 액자식 구성을 택했다"라고 설명했는데요. 흥미로운 건 이 영화가 창작자를 주인공으로 삼으면서도 그를 영웅화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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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가 '이'는 빛나는 영감을 얻거나 예술적 돌파구를 찾지 못하죠. 오히려 자신의 무력감과 부끄러움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뿐인데요. 이 솔직함이 미야케 쇼 감독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것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는 왜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야기를 만들까요? 미야케 쇼 감독은 답하는 대신, 여름 해변과 겨울 설원을 보여줍니다. 그 풍경 속에서 잠시 머물다 떠나는 사람들을. 그들이 남긴 발자국이 파도와 눈에 지워지기 전의 그 짧은 순간을 말이죠. ★★★☆

2025/12/02 CGV 용산아이파크몰

※ 영화 리뷰
- 제목 : <여행과 나날> (Two Seasons, Two Strangers, 2025)
- 개봉일 : 2025. 12. 10.
- 제작국 : 일본
- 러닝타임 : 89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미야케 쇼
- 출연 : 심은경, 카와이 유미, 타카다 만사쿠, 츠츠미 신이치, 사노 시로 등
- 화면비율 : 1.37: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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