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의 나라가 들려주는 가장 어두운 동화

[별세개반이상만 #72] <바늘을 든 소녀>

by 양미르 에디터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는 왜 그토록 슬플까요? 다리를 얻는 대신 목소리를 잃고, 사랑을 얻지 못하면 바다 거품이 되어야 한다는, 그 가혹한 교환의 법칙 때문이겠죠. 매그너스 본 혼 감독의 <바늘을 든 소녀>를 보며 덴마크라는 나라가 품은 동화의 본질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안데르센의 나라답게, 이 영화는 한 편의 잔혹 동화처럼 읽히죠. 하지만 '인어공주'와 달리, 이 이야기는 상상이 아니라 1910년대 코펜하겐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그것이 더 무섭죠.

1919년 코펜하겐. 군수 물품을 만드는 방직 공장에서 일하는 '카롤리네'(빅 카르멘 손네)는 전쟁에 참전한 남편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데요. 전사자 명단에 이름이 없으니 미망인 수당도 받을 수 없고, 밀린 월세 때문에 다락방에서조차 쫓겨날 처지죠. 그런 '카롤리네'에게 공장 사장 '예르겐'(요아힘 펠스트룹)이 다가옵니다. 백마 탄 왕자처럼 보였던 이 남자와의 관계는 임신으로 이어지지만, 사장 어머니의 냉혹한 반대 앞에서 약혼은 깨지죠. 설상가상으로 죽은 줄 알았던 남편 '피터'(바시르 세시리)가 얼굴 반쪽이 뭉개진 채 돌아옵니다.

4889_5234_2131.jpg 사진 = 영화 '바늘을 든 소녀' ⓒ 그린나래미디어(주)

'카롤리네'는 공중목욕탕에서 긴 바늘로 스스로 낙태를 시도하는데요. 영화의 제목이 가리키는 바로 그 바늘입니다. 그 순간 '다그마르'(트린 디어홀름)라는 중년 여성이 나타나 '카롤리네'를 구하죠. 사탕가게를 운영하는 '다그마르'는 원치 않는 아이를 낳은 여성들을 도와 입양을 주선한다고 말합니다. '카롤리네'는 아이를 낳자마자 '다그마르'를 찾아가지만, 사탕가게 문 너머에는 상상할 수 없는 어둠이 기다리고 있었죠.


매그너스 본 혼 감독은 이 영화를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불렀는데요. "다락방에 사는 가난한 여자, 겉보기에는 백마 탄 왕자지만 사실은 겁쟁이인 남자, 얼굴은 없지만 황금 같은 마음을 가진 괴물, 그리고 사탕가게에 사는 마녀"가 등장하는 이야기라고 말이죠. 실제로 영화는 동화의 골격을 충실히 따르는데요. 하지만 이 동화가 무서운 이유는 해피엔딩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1913년부터 1920년까지 최소 9명에서 25명의 영유아를 살해한 덴마크 연쇄살인범 '다그마르 오베르뷔'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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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감독은 연쇄살인범의 전기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대신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허구의 인물 '카롤리네'를 전면에 배치했죠. "이것이 한 여성 안의 악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라는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범죄 그 자체보다 "왜 그런 범죄가 가능했는가"를 묻습니다. '카롤리네'가 '다그마르'의 집에 발을 들여놓기까지의 과정에 영화는 거의 한 시간을 할애하죠.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당시 코펜하겐이라는 도시가 얼마나 여성들에게 지옥이었는지를 온몸으로 체감합니다.

촬영감독 미하우 디멕과 함께 만든 흑백 화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선언인데요. 3:2 비율, 즉 1920년대 사진의 화면비를 선택한 것도, 뤼미에르 형제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1895년)을 오마주하는 장면을 넣은 것도, 관객을 그 시대 속으로 완전히 끌어들이기 위한 장치입니다. 감독은 로케이션 헌팅 단계부터 이 비율로 스틸을 촬영하며 영화 전체의 톤을 조율했다고 밝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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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그너스 본 혼 감독은 흑백 촬영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관객이 이 영화를 받아들이고 소화할 수 있도록 필요한 일종의 '거리감'을 만들어낸다. 영화 초반에는 안전한 느낌을 주고, 이야기로 더 깊이 들어가면 감정적인 이야기와 가까워지며 결국 이 영화가 과거에 설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라고 말했는데요. 실제로 영화를 보는 경험은 그의 말 그대로입니다. 처음엔 고전 영화를 보는 듯한 안전한 거리감이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거리는 사라지고 우리는 '카롤리네'의 어깨 너머에서 함께 숨을 죽이게 되죠.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며 "지옥에서도 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탐구하고 싶었다고 말했는데요. 영화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죠. '카롤리네'도, '다그마르'도, 얼굴이 뭉개진 남편 '피터'도 모두 선과 악의 경계 어딘가에 서 있습니다. '예르겐'은 겁쟁이 왕자이고, '피터'는 외면은 괴물이지만 내면은 황금 같은 존재죠. '다그마르'는 마녀이지만 동시에 같은 고통을 겪은 여성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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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지점은 영화가 여성들을 갈등의 전면에 배치한다는 것인데요. '카롤리네'를 내치는 것은 '예르겐'의 어머니이고, 재판정에서 '다그마르'를 규탄하는 것도 여성들입니다. 남성들은 화면 밖에 있거나 무력하게 그려지죠. 감독은 이에 대해 "이 세계는 여성들에게 지옥이다. 여성들은 남성보다 열 배 더 싸워야 하고, 부유한 남성보다 백 배는 더 싸워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흥미로운 주인공이 된다"라고 밝혔습니다.

한편, 영화 속에서 바늘은 여러 의미를 갖죠. 바늘은 해를 가하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무언가를 꿰매 새로운 것을 만드는 도구이기도 한데요. 바늘로 끊으려 했던 관계를, 바늘로 꿰매는 이야기를 통해 영화는 현재를 이야기합니다. 여성의 선택권은 누구의 것인가. 극한의 빈곤과 절망 앞에서 인간은 어디까지 추락하는가. 이 질문들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2024/10/03 CGV 센텀시티 IMAX
-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상영작



※ 영화 리뷰
- 제목 : <바늘을 든 소녀> (The Girl with the Needle, 2024)
- 개봉일 : 2025. 12. 10.
- 제작국 : 덴마크
- 러닝타임 : 123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매그너스 본 혼
- 출연 : 빅 카르멘 손네, 트린 디어홈, 바시르 세시리, 요아힘 펠스트룹, 테사 호더 등
- 화면비율 : 1.44: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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