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38] <오세이사>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전날의 기억이 모두 사라지는 소녀가 있다. '한서윤'(신시아)은 사고 후유증으로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어, 침대 옆 노트에 적힌 일기와 방 곳곳에 붙은 메모들로 어제를 복기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학교에 가서도 휴대폰 메모장을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친구 '지민'(조유정)이 건네는 정보들을 부지런히 기록한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서윤'은 나름의 균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런 '서윤' 앞에 '김재원'(추영우)이 나타난다.
옆 반 친구들의 장난에 떠밀려 '서윤'에게 고백을 하게 된 '재원'은 당연히 거절당할 거로 생각했지만 의외로 '서윤'이 "그래"라며 고백을 받아들이자 당황한다. '서윤'은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첫째, 문자는 짧게. 둘째, 학교에서는 말 걸지 않기. 셋째, 진짜로 좋아하지 않기. 거짓 고백으로 시작된 만남이지만, '재원'은 '서윤'과 보내는 방과 후 시간이 자신의 무료한 일상에 균열을 만든다는 걸 깨닫는다.
노래방에서, 여수 바닷가에서, 불꽃축제장에서 함께 웃고 떠들며 '재원'은 '서윤'에게 진심으로 빠져든다. 하지만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잠에서 깬 '서윤'이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 '재원'은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지민'에게서 '서윤'의 병에 대해 전해 듣고 충격을 받지만, '재원'은 매일 '서윤'의 기억을 채워주겠다고 다짐한다. "내일의 너도 즐겁게 해줄게"라는 약속과 함께.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를 연출한 김혜영 감독은 이치조 미사키의 동명 원작 소설을 읽으며 "좋아한다는 감정은 감각에 기인한 것"이라는 문장에 가장 끌렸다고 밝혔다. 기억이 사라져도 감각은 남는다는, 그래서 사랑은 뇌가 아니라 몸이 기억한다는 원작의 철학을 한국적 정서로 옮기는 작업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었다. 김 감독은 "원작에 대한 애정과 멜로 감성에 대한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라고 말하며 가족 간 갈등을 축소하고 두 주인공의 감정선에 집중했다. 그 결과 영화는 원작보다 훨씬 밝고 풋풋한 톤을 갖게 됐다.
문제는 이 선택이 양날의 검이었다는 점이다. 밝게 만들기 위해 어둠을 지웠고, 쉽게 만들기 위해 복잡함을 버렸으며, 친절하게 만들기 위해 여백을 없앴다. 원작 소설과 일본 영화가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들다가 마지막에 모든 퍼즐을 맞추는 구조였다면, 한국판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시간 순서대로 A부터 Z까지 차근차근 설명한다. '재원'이 직접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는 대사들("나 운동 싫어해", "도망도 딱히 못 갈 걸")이 영화 곳곳에 배치되어 있고, 내레이션은 감정의 상태를 친절하게 안내한다.
영화는 관객이 길을 잃을까 봐 걱정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관객은 목적지가 뻔히 보이는 길을 천천히 걷는 지루함을 느낀다. 편집의 리듬도 묘하다. 초반 '재원'과 '서윤'이 가까워지는 과정에는 필요 이상의 시간을 할애한다. 네컷 사진을 찍고, 노래방에서 너드커넥션의 '좋은 밤 좋은 꿈'을 부르고, 여수 바닷가를 거닐며 손을 잡는 장면들이 느긋하게 이어진다. 반면, 후반부 핵심 사건이 터지고 두 사람의 감정이 폭발해야 할 순간들은 숏폼 콘텐츠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불꽃놀이 장면과 이별 장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이 순간들에서 카메라는 배우들의 감정이 충분히 익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추영우는 촬영 전 인터뷰에서 "전작에서 만든 몸이 쉽게 빠지지 않아 그대로 촬영에 임했다"라고 밝혔다. <견우와 선녀>(2025년)에서 만든 근육질 몸이 고교생 역할을 위해 다이어트를 시도했음에도 유지됐다는 것. 이 고백은 솔직하지만, 동시에 영화의 가장 큰 문제를 드러낸다. '재원'은 심장 질환을 앓고 있어 격한 운동을 할 수 없고, 계단을 오르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설정이다. 그런데 스크린 위 추영우는 여름 하복 반팔 교복 사이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전완근과 이두박근을 자랑한다. "나 운동 싫어해"라는 대사가 나올 때마다 관객은 스크린 속 육체와 대사 사이의 괴리를 목격해야 한다.
이것은 배우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캐스팅 디렉터와 감독이 함께 결정해야 할 문제였다. 일본판에서 미치에다 슌스케가 연기한 '토루'는 실제로 창백하고 가느다란 체구로 병약함을 시각적으로 전달했다. 한국판은 그 설정을 유지하면서도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진 배우를 캐스팅했고, 이 모순을 대사로 땜질하려 했다. 결과적으로 재원이라는 캐릭터는 영화 내내 설득력을 잃는다. 후반부 중요한 전환점이 왔을 때 관객은 "이 건강해 보이는 청년에게 갑자기 무슨 일이?"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신시아는 상대적으로 캐릭터와 배우의 이미지가 잘 맞는다.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2025년)에서 보여준 환한 미소와 투명한 분위기가 '서윤'의 밝은 에너지와 맞아떨어진다. 매일 기억을 잃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하루를 맞이하는 '서윤'의 태도를 신시아는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하지만 이 역시 한계가 있다. '서윤'이라는 캐릭터가 영화 안에서 입체적으로 구축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윤'은 밝고, 순수하고, 사랑스럽지만 그 이상의 복잡함을 보여주지 못한다. 기억 상실이라는 설정이 캐릭터를 깊게 만드는 도구가 아니라 로맨스를 위한 장치로만 기능한다.
여기에 기억 상실과 첫사랑의 조합은 이미 수많은 로맨스 작품에서 다뤄졌고,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그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예측할 수 있는 전개, 익숙한 갈등 구조, 뻔한 해결 방식이 반복된다. 영화는 관객이 눈물을 흘려야 할 타이밍을 정확히 알고 있고, 그 타이밍에 음악을 깔고 슬로우 모션을 넣는다.
결국, 이 영화는 추영우와 신시아라는 두 배우의 이미지로 버티고 간다. 그들의 얼굴과 미소, 그들이 만들어내는 청춘의 분위기가 영화를 끌고 간다. 하지만 버티는 것과 완성하는 것은 다르다. 아무리 든든한 기둥이라도 건물 전체의 설계가 부실하면 그 기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
2025/12/22 CGV 용산아이파크몰
※ 영화 리뷰
- 제목 :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Even If This Love Disappears from the World Tonight, 2025)
- 개봉일 : 2025. 12. 24.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106분
- 장르 : 멜로/로맨스
-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김혜영
- 출연 : 추영우, 신시아, 조유정, 진호은, 조한철 등
- 화면비율 : 2.39: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