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가 보이지 않던 연애의 마지막을 빛과 함께

[별세개반이상만 #75] <만약에 우리>

by 양미르 에디터

※ 영화 '만약에 우리'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0년 만의 재회는 언제나 묘합니다. 베트남 호찌민에서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 안, '은호'(구교환)와 '정원'(문가영)은 우연히 마주치죠. 태풍으로 비행기가 결항하고, 같은 호텔에 머물게 되면서 이들은 10여년 전 그 시절로 돌아갑니다. 김도영 감독의 <만약에 우리>는 중국 영화 <먼 훗날 우리>(2018년)의 리메이크작이지만, 원작을 그저 옮겨놓은 작품이 아닌데요. 감독은 빛과 공간이라는 시각적 언어를 통해 사랑의 탄생과 소멸을 섬세하게 재구성합니다.

2008년, 고향으로 내려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은호'와 '정원'은 처음 만났는데요. 삼수 끝에 서울로 올라온 컴퓨터공학과 학생 '은호'는 게임 개발로 100억 원을 벌겠다는 꿈을 꾸고, 보육원 출신 '정원'은 건축사가 되어 자신만의 집을 짓고 싶어 합니다. 산사태로 버스가 멈춰 서고, '정원'은 '은호'의 아버지가 있는 가게로 향하게 되죠. 우정으로 시작한 관계는 '정원'의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자연스럽게 연애로 이어집니다.

4933_5359_4418.jpg 사진 = 영화 '만약에 우리' ⓒ (주)쇼박스

가난하지만 서로가 있어 괜찮았던 시간. '은호'의 좁은 자취방에서 두 사람은 세상을 다 가진 듯 사랑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이들을 그냥 두지 않죠. 취업은 안 되고, 월세는 오르고, 꿈은 점점 멀어집니다. 서로를 응원하던 연인은 어느새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가 되어가죠. 그렇게 이들은 헤어졌고, 10년이 흘렀습니다. '은호'는 게임 회사의 '나름 높은 위치'에 있으며, '정원'도 자신의 꿈을 이루고 있죠. 둘 다 각자의 방식으로 꿈을 이뤘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를 잃어버렸습니다.


<만약에 우리>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공간을 통해 관계의 변화를 포착하는 방식입니다. 특히 창문과 커튼의 사용은 원작에 없던 김도영 감독만의 독창적인 장치인데요. '정원'이 사는 고시원은 창틈으로 들어오는 손바닥만 한 햇빛조차 제대로 가질 수 없는 공간인데요. 보육원에서 자라며 늘 임시 거처에 머물러 있던 '정원'에게, 그 좁은 빛은 '정원'에게 허락된 현실의 크기죠. '은호'는 그런 '정원'을 자신의 자취방으로 데려와 창문을 활짝 열어젖힙니다. 햇빛을 온전히 '정원'에게 내어주는 이 장면은, 사랑이 한 사람의 세계를 어떻게 확장하는지를 보여주죠.

4933_5360_4436.jpg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은호'는 변합니다. 게임 개발은커녕 게임을 하며 시간을 축내던 그는 '정원'이 보는 앞에서 거칠게 커튼을 닫아버리죠. 한여름에도 선풍기를 '정원' 쪽으로만 틀어주던 '은호'가 이제는 자기 쪽으로만 바람을 돌립니다. 이 작은 변화들은 사소해 보이지만, 관계의 균열을 예고하는 결정적 신호죠. 한때 '정원'에게 온 세상의 빛을 주겠다던 사람이, 이제는 '정원'을 어둠 속에 남겨둡니다. 감독은 이 모티프를 통해 현실이 사랑을 어떻게 잠식하는지를 시각화하죠.

빛은 희망이고 미래이며 가능성이죠. '은호'가 '정원'에게 빛을 나눠줄 때, 두 사람에게는 미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취업 실패와 생활고 속에서 '은호'는 더 이상 '정원'에게 빛을 줄 여유가 없어지죠. 김도영 감독은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보는 진한 사랑과 엉망진창 이별에 관한 영화"라고 말했는데, 이 '엉망진창'의 과정을 감독은 공간의 언어로 치밀하게 번역해 냈습니다.

4933_5361_4446.jpg

원작에서 가져온 흑백과 컬러 전환 설정 역시 탁월한데요. 현재 시점의 재회 장면은 모두 흑백으로 처리되죠. '은호'가 개발하려던 게임의 세계관이 그대로 현실이 된 것입니다. 과거 회상 장면이 컬러로 펼쳐질 때, 우리는 그 시절이 얼마나 찬란했는지를 깨닫는데요. 가난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온 우주의 별이 담겨 있었습니다.

2010년대 한국의 취업난과 N포 세대의 풍경은 2025년의 관객에게도 여전히 낯설지 않은데요. '88만 원 세대', '삼포세대'라는 단어들이 떠돌던 그 시절, 사랑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청춘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물론, <만약에 우리>는 한계도 분명한데요. 초반부는 익숙한 멜로 공식을 벗어나지 못하죠. 우연한 만남, 천천히 싹트는 감정, 반짝이는 연애의 시작. 이 과정이 새롭지는 않습니다. 주변 인물들 역시 기능적 역할에 머물며, 특히 '은호'의 아버지(신정근)를 제외하면 입체적인 캐릭터를 찾기 어렵습니다.

4933_5362_4457.jpg

무엇보다 멜로라는 장르 자체가 현재 극장가에서는 불리한 위치에 있는데요. 강렬한 볼거리와 즉각적인 쾌감을 원하는 관객들에게, 조용히 감정선을 따라가는 이 영화는 다소 담담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만약에 우리>가 의미 있는 건, 이별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이죠. 영화는 헤어짐을 실패가 아니라 성장의 과정으로 봅니다. 10년 만에 재회한 '은호'와 '정원'은 더 이상 서로를 붙잡지 않고, 진심으로 상대의 행복을 기원하죠. 두 사람이 다시 색을 되찾는 순간은, 과거를 미화하거나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화해의 시간이었습니다. ★★★☆

2025/12/25 CGV 영등포타임스퀘어

※ 영화 리뷰
- 제목 : <만약에 우리> (Once We Were Us, 2025)
- 개봉일 : 2025. 12. 31.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115분
- 장르 : 멜로/로맨스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김도영
- 출연 : 구교환, 문가영, 신정근, 이상엽, 김서원 등
- 화면비율 : 2.3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매거진의 이전글예리한 시선과 소리로, 반복되는 여성의 아픔을 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