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개반이상만 #78] <마이 선샤인>
홋카이도의 작은 시골 마을, 야구 경기 중인 초등학교 6학년 '타쿠야'(코시야마 케이타츠)는 외야에 서 있습니다. 공이 날아오건 말건, 소년의 시선은 하늘로 향하죠.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인데요. 눈송이가 얼굴에 닿는 순간의 차가움,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가는 광경. '타쿠야'에게 이 첫눈은 긴 겨울의 시작이자, 인생의 전환점이 될 계절의 예고편이었죠.
겨울이 오면 학교 체육은 아이스하키로 바뀝니다. 야구에서도 존재감 없던 '타쿠야'는 당연히 아이스하키에서도 가장 못하는 아이죠. 골대 수비라는, 아무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자리를 떠맡고 링크 한구석에 서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같은 링크에서 연습 중인 한 소녀가 눈에 들어오죠. 중학교 1학년인 '사쿠라'(나카니시 키아라)는 빙판 위를 춤추듯 미끄러지는데, '타쿠야'는 넋을 잃고 바라봅니다. 하키 연습이 끝나도 링크를 떠나지 못하고, 혼자 남아 '사쿠라'의 동작을 어설프게 따라 해보죠.
이 모습을 지켜본 이가 있는데요. '사쿠라'의 코치이자 전직 피겨 선수였던 '아라카와'(이케마츠 소스케)입니다. 그는 '타쿠야'의 서툰 움직임에서 순수한 열정을 발견하고, 방과 후 비밀 수업이 시작되죠. 스케이트조차 제대로 타지 못하던 '타쿠야'가 조금씩 실력을 쌓아가고, 어느 날 '아라카와'는 파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싱글로만 연습하던 '사쿠라'와 초보자 '타쿠야'가 페어를 이뤄 도전하자는 것이죠.
오쿠야마 히로시 감독은 자신이 어릴 적 피겨 스케이팅을 배웠던 경험을 영화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모든 것이 경이롭고 새롭게 느껴진다. 사소한 일에도 크게 기뻐하고, 깊은 상처를 받는다"라고 그는 말했는데요. 하지만 이 영화를 만드는 데 6년이 걸렸죠. 2018년 22세의 나이로 산세바스티안 국제영화제 신인감독상을 받은 천재 감독에게도, 기억만으로는 영화를 완성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환점은 두 번의 만남이었는데요. 첫째는 배우 이케마츠 소스케와의 작업이었죠. 다큐멘터리 촬영 중 그와 대화를 나누며 "지금이기에 더욱 따뜻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라는 마음을 나눴고, 그의 이미지를 떠올리자 '아라카와' 코치라는 캐릭터가 단숨에 그려졌습니다. 둘째는 험버트 험버트의 노래 '마이 선샤인'과의 조우인데요. "나는 말을 잘할 수 없어, 첫 음절에서 막혀버려"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모든 작업이 중단됐던 감독을 위로했고, 미뤄뒀던 시나리오를 다시 쓰게 만들었습니다.
<마이 선샤인> 속 세 사람은 각자 외로웠죠. '사쿠라'는 혼자 연습하는 싱글 선수였고, '타쿠야'는 말을 더듬고 친구도 없는 아이였으며, '아라카와'는 세상에 드러낼 수 없는 관계 때문에 늘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만났을 때, 혼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온기가 생겨났죠. 감독의 말대로 눈이 내리며 생겨난 작은 삼각형 같은 관계였는데요. 조화롭고 균형 잡혔지만, 눈이 녹듯 언젠가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관계 말이죠.
이 영화의 가장 큰 무기는 영상미입니다. 오쿠야마 감독은 연출, 각본, 촬영, 편집을 모두 혼자 도맡았는데요. 특히 촬영에서 그의 집념은 놀랍죠. 7년간 피겨 스케이팅을 배운 경험을 살려, 그는 직접 스케이트를 타면서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배우들을 따라갔습니다. 30분 넘게 롱테이크로 촬영하기도 했죠. 빙판 위의 차가운 긴장감, 날의 반사, 몸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유려한 선, 이 모든 것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아이스링크 장면이 압도적이라면, 야외 장면은 한 폭의 그림인데요. 4:3 화면비는 일견 답답해 보이지만, 오히려 집중과 여백을 동시에 만들어냅니다. 눈 덮인 홋카이도의 풍경 속에 세 사람을 정중앙에 배치한 구도는 마치 오래된 사진첩 속 한 장면처럼 아련하죠. 감독은 "2001년 무렵의 설국"이라는 설정만 스태프들과 공유했을 뿐, 특정 지역의 사투리를 쓰지 않았는데요. 추억은 구체적일수록 보편성을 잃기 때문입니다.
'타쿠야'의 말더듬증은 감독 자신이 겪었던 틱 장애 경험과 '마이 선샤인' 노래 속 화자의 이야기가 합쳐진 설정이죠. 하지만 오쿠야마 감독은 이를 가볍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말더듬증 가족 워크숍에 직접 참여했고, 한 아이가 했던 말이 그의 마음에 박혔는데요. "말더듬증에 대해 이해하거나 배우는 걸 바라는 게 아니라 그냥 내버려두기만 했으면 좋겠다"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영화는 '타쿠야'에게 '코세이'(윤호)라는 친구를, '아라카와'에게 '이가라시'(와카바 류야)라는 연인을 배치했습니다. 주인공들을 있는 그대로 봐주고 무조건 긍정해 줄 수 있는 사람. 말더듬증이나 동성애가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나 드라마의 소재가 아니라, 그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보통의 일상이 되길 바랐기 때문이죠.
물론, 세상은 그렇게 따뜻하지 않습니다. 세 사람의 관계는 서서히 균열이 가죠. 영화는 이 과정을 설명하지 않고, 응시와 침묵으로만 보여줄 뿐입니다. 세 사람은 끊임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그 시선 안에 모든 감정이 담기죠. 그런데 세 사람 모두 슬퍼 보이지 않는데요. 함께였던 시간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데, 그들의 얼굴에는 담담함이 있습니다. 겨울이 지나가듯 관계도 지나간다는 것, 하지만 그 순간들이 자기 안에 남는다는 것을 깨달은 표정이죠. 그 소년은 마지막에 무, 무어라 말했을까요? 어쩌면 말하지 않았기에, 더 많은 것을 전한 것은 아닐까요? ★★★☆
2025/12/23 CGV 용산아이파크몰
※ 영화 리뷰
- 제목 : <마이 선샤인> (My Sunshine, 2024)
- 개봉일 : 2026. 01. 07.
- 제작국 : 일본
- 러닝타임 : 91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전체 관람가
- 감독 : 오쿠야마 히로시
- 출연 : 코시야마 케이타츠, 나카니시 키아라, 이케마츠 소스케, 와카바 류야, 야마다 마호 등
- 화면비율 : 1.33: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