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43] <리틀 아멜리>
1960년대 후반 일본 고베, 벨기에 외교관 가정의 막내딸 '아멜리'(루이즈 샤르팡티에 내레이션/에밀루 홈스 목소리)는 태어난 지 2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의사는 "식물 상태"라는 진단을 내리고, 가족들은 조용히 그 아이를 지켜볼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벨기에에서 찾아온 할머니(캐시 세르다 목소리)가 건넨 화이트초콜릿 한 조각이 '아멜리'를 깨운다.
세상에 눈을 뜬 '아멜리'는 갑자기 완벽한 문장으로 말하기 시작하고, 첫 단어는 '엄마'도 '아빠'도 아닌 '진공청소기'다. 사물을 빨아들여 사라지게 만드는 그 기계가, 아이의 눈에는 신처럼 보였다. '아멜리'는 자신 역시 신이라고 믿는다. 아니, 정확히는 '튜브'다. 음식을 삼키고 배출하는, 세상을 관찰만 할 뿐 개입하지 않는 존재. 어느 날, 일본인 가정부 '니시오'(빅토리아 그로부아 목소리)를 만나면서 '아멜리'의 세계는 조금씩 확장되기 시작한다.
'니시오'는 '아멜리'를 아이 취급하지 않았다. '니시오'는 '아멜리'의 눈높이에 몸을 낮춰 세상을 함께 바라보고, 진지한 질문에는 진지하게 답한다. 이를테면, '니시오'는 저녁 준비를 하면서 자신의 전쟁 기억을 들려준다. 썬 야채가 냄비에 떨어지는 것은 폭탄이 되고, 끓어오르는 증기는 화염이 되며, 쌀을 씻는 손놀림은 잔해 속에서 탈출하던 순간으로 변한다. 끔찍한 이야기지만, '아멜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된 트라우마다.
그렇게 '니시오'는 '아멜리'에게 세상에는 아름다움만큼이나 슬픔도 깊이 새겨져 있음을 가르친다. 하지만 이 관계는 영원하지 않다. 집주인 '카시마'(유미 후지모리 목소리)는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후 서양인을 불신한다. '니시오'가 벨기에 아이에게 마음을 주는 모습이 '카시마'에겐 배신처럼 느껴진다. <리틀 아멜리>를 연출한 메일리스 발라데와 리안 조 한 감독은 아멜리 노통브의 자전적 소설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을 각색하며, 아이의 시선을 시각 언어로 번역하는 데 집중했다.
두 감독은 원작을 읽고 "3살 아이가 세상을 처음 인식하는 순간을 어떻게 영화로 옮길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작품을 출발했다고 밝혔다. 리안 조 한 감독은 19살에 이 소설을 처음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고, 이후 메일리스 발라데 감독에게 책을 선물하며 영화화를 제안했다. 메일리스 발라데 감독은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이었던 것은 아멜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아주 어린 소녀의 시선으로 주변을 얼마나 민감하고 풍부하게 느끼는지, 그 감각이 특별했다"라고 회상했다.
그래서 영화는 명확한 윤곽선을 지우고, 수채화처럼 번지는 색채로 세상을 그려낸다. 제작팀은 초기 단계부터 에딘 노엘 미술감독과 긴밀히 협업하며 파스텔 빛 색감과 질감이 살아있는 비주얼 방향성을 잡았다. 라인 드로잉과 수채화 기법으로 아날로그함이 살아있는 캐릭터 디자인을 완성했고, 전면 디지털 제작이었음에도 아날로그의 신선함을 최대한 살리고자 노력했다. 특히 배경 채색 작업을 일반적인 제작 마지막 단계가 아닌 프로젝트 초기부터 진행하며, 사계절 풍경에 입체감을 덧붙였다. 봄의 선명하고 강렬한 빛은 점차 겨울의 희미하고 현실감 있는 톤으로 조정되며 '아멜리'의 내면 변화를 시각화한다.
'아멜리'의 눈에 비친 일본은 벚꽃과 잉어 모양 양말, 강에 떠내려가는 등불로 가득한 환상의 나라다. 하지만 동시에 전쟁의 그림자가 여전히 드리워진, 상처받은 어른들의 땅이기도 하다. 이 이중성이 영화의 핵심이다. 제작진이 레퍼런스로 제시한 칸노 요코와 댄 로머의 음악, 일본 전통 동요 '타케다의 자장가', 라벨의 피아노곡 '물의 장난'은 모두 이 이중성을 담고 있다.
일본 전통 신앙에서 아이는 7세까지 '오코사마(lord child)', 즉 신의 영역에 속한 존재로 여겨진다. 인지 능력이 발달하면서 점차 인간 세계로 내려오는 것이다. '아멜리'가 자신을 신이라 믿는 설정은 허황한 상상이 아니라, 일본 문화 안에서는 자연스러운 관념이다. 원작자 아멜리 노통브 자신도 일본 고베에서 2살부터 5살까지 살았고, 그곳을 자신의 진정한 고향이라 여겼다. 노통브는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일본, 중국, 미국, 방글라데시, 미얀마, 라오스 등을 옮겨 다니며 성장했는데, 이러한 다문화 정체성은 노통브의 중요한 인생 자산이 되었다.
영화는 원작의 다양한 테마 중에서도 '아멜리'와 '니시오' 사이의 유대, 상실의 아픔, 그리고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 나가는 과정에 집중했다. 그래서인지 77분이라는 짧은 상영 시간은 이 야심 찬 주제들을 온전히 펼쳐내기에는 빠듯하다. '카시마'는 전쟁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인물로 설정되었지만, 영화는 '카시마'의 내면을 충분히 들여다보지 못한다. '카시마'는 '아멜리'를 경계하고, '니시오'를 견제하지만, 관객은 '카시마'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잃었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전쟁으로 상처받은 사람"이라는 기호로만 남는다.
내레이션 역시 마찬가지다. 감독들은 원작의 독특한 서술 시점을 살리기 위해 고심했고, 모든 과정을 지나온 4살쯤 된 '아멜리'를 내레이션의 화자로 설정했다. 메일리스 발라데 감독은 "주인공 아이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흐르길 바랐다. 그 목소리를 아이로 할 것인지, 어른으로 할 것인지, 거리감은 어느 정도로 둘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실제 대사와 내레이션을 구분하기 위해 여러 배우가 투입된 결과, 때로 내레이션이 지나치게 설명적으로 느껴지며 영화의 시각적 흐름을 방해한다.
결정적으로, 한국 관객의 입장 <리틀 아멜리>는 조금 다르게 읽힌다. 전후 일본을 배경으로, 전쟁의 상처를 간직한 일본인들을 묘사하면서도, 정작 그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누구에게 어떤 책임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카시마'가 서양인을 불신하는 이유는 '카시마'가 "전쟁으로 가족을 잃었기 때문"이지, 일본이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 아니다. 이러한 시각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일본을 피해자의 위치에 놓는 서구 영화들의 전형적인 프레임을 답습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품은 진심을 부정할 수는 없다. 3살 아이가 세상과 맺는 첫 관계, 죽음과 마주하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아픔은 어떤 문화권에서든 보편적이다. 다만 그 보편성이 특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 놓일 때, 우리는 조금 더 신중해져야 한다. <리틀 아멜리>는 아름답다. 영롱하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가리는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
2025/11/28 CGV 압구정
- 제51회 서울독립영화제(SIFF) 상영작
※ 영화 리뷰
- 제목 : <리틀 아멜리> (Little Amélie or the Character of Rain, 2025)
- 개봉일 : 2026. 01. 14.
- 제작국 : 프랑스
- 러닝타임 : 77분
- 장르 : 애니메이션
- 등급 : 전체 관람가
- 감독 : 메일리스 발라데, 리안 조한
- 목소리 출연 : 루이즈 샤르팡티에, 에밀루 홈스, 빅토리아 그로부아, 유미 후지모리, 캐시 세르다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