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44] <광장>
애니메이션 영화 <광장>이 다루는 건 평양이다. 스웨덴 대사관 1등 서기관 '이삭'(이찬용 목소리)과 교통보안원 '서복주'(이가영 목소리)의 관계를 중심으로, 북한 사회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고립을 그린다. 소재 자체가 모험이다. 북한은 한국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지만 대부분 스릴러나 첩보물의 배경이었다. 애니메이션으로, 그것도 로맨스를 축으로 평양을 재현한다는 건 쉽지 않은 선택이다.
김보솔 감독은 당연히 평양에 가본 적이 없다. 대신 구글 이미지 검색과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탈북민 인터뷰로 평양을 재구성했다. 눈 쌓인 대동강, 텅 빈 대로, 주체사상탑 앞의 계단. 이 공간들은 배경 이상의 역할을 한다. 금발의 '이삭'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평양의 겨울은 단지 춥기만 한 게 아니라 적대적이다. 애니메이션이 아니면 구현할 수 없었을 풍경이고, 이 점에서 매체 선택은 정확했다.
북한을 다루면서도 <광장>은 체제 비판에 집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건 감시 사회에서 사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문제다. '이삭'과 '복주'는 다리 밑에서 만난다. 그들의 대화는 로맨스라기보다 조심스러운 탐색에 가깝다. 서로 좋아하지만, 미래는 없다. 이별이 예정된 관계. 북한이라는 특수한 공간이 만들어낸 비극이지만, 어쩌면 우리가 일상에서도 마주하는 감정일 수 있다.
'이삭'의 할머니는 한국전쟁 후 중립국을 택해 스웨덴으로 간 인물이다. 그 손자가 다시 한반도로 돌아왔다. 역사가 순환한다기보다, 분단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뜻이다. 할머니가 택배로 보낸 스웨덴 소시지를 '이삭'은 소주와 함께 먹는다. 스웨덴 음식과 한국 술의 조합. '이삭'은 한국어를 하지만 금발 때문에 평양 시민들은 그를 피한다. 언어가 통해도 외모가 장벽이 되는 곳. 외교관이라는 신분이 주는 특권과 이방인으로서의 소외가 동시에 존재하는 아이러니가 '이삭'이라는 인물을 만든다.
<광장>의 서브 주인공은 통역관 '리명준'(전운종 목소리)이다. '명준'은 <광장>에서 가장 복잡하고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이삭'을 감시해야 하는 보위부 요원이면서, 동시에 '이삭'이 건네는 맥주와 삶은 달걀을 거절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 거절은 개인적 반감 때문이 아니라 체제가 부과한 공포 때문이다. '명준'이 느끼는 건 외로움이 아니라 불안이다. 외로움을 느끼려면 먼저 자유가 있어야 하는데, '명준'에게는 그 자유가 없다.
영화 후반부, '명준'이 '이삭'을 돕기로 결심하는 순간은 그래서 더 절박하다. 왜 도왔냐는 질문에 그는 자신도 외로웠다고 답한다. 불안의 장막이 걷히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고립되어 있었는지 깨닫는 것. 이 순간 '명준'은 체제의 대리인에서 한 명의 인간으로 전환된다. 최인훈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이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중립국을 선택했다면, 영화 속 '리명준'은 체제 안에서 작은 균열을 만들어낸다. 이 차이가 흥미롭다.
73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은 양날의 검이다. 이야기 전달의 흐름이 타이트해서 지루할 틈이 없지만, 동시에 캐릭터들의 감정선이 좀 더 충분히 전개될 여지를 놓쳤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복주'가 사라진 후 '이삭'이 '복주'를 찾아 헤매는 중반부는 긴장감이 있지만, '복주'라는 인물 자체가 '이삭'과 '명준'에 비해 덜 입체적으로 그려진 건 사실이다. '복주'는 용감하고 진취적인 '장마당 세대'라는 설정을 하고 있지만, 영화 안에서 그 면모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광장>은 한국 애니메이션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확장한 작품이다. 지금까지 한국 애니메이션은 주로 어린이를 타깃으로 하거나, 흥행을 목표로 한 상업 작품 위주였다. 정치적 현실을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작가주의적 완성도를 추구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광장>은 그 빈자리를 채우려는 시도이고, 김보솔 감독이 5년 11개월 동안 이 작품에 쏟은 집요함이 느껴진다. 그 시간이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건 분명하다. ★★★
※ 영화 리뷰
- 제목 : <광장> (The Square, 2026)
- 개봉일 : 2026. 01. 15.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73분
- 장르 : 애니메이션
-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김보솔
- 목소리 출연 : 전운종, 이찬용, 이가영, 이유준, 서원석 등
- 화면비율 : 2.39: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