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가 없는 '햄릿'으로 변화를 모색하기엔

[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47] <끝이 없는 스칼렛>

by 양미르 에디터
4972_5485_43.jpg 사진 = 영화 '끝이 없는 스칼렛' ⓒ 소니 픽쳐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6년)로 세계 애니메이션계에 이름을 알렸고, 〈늑대아이〉(2012년), 〈괴물의 아이〉(2015년)를 거치며 입지를 굳혔다. 여기에 〈미래의 미라이〉(2018년)로 아카데미 장편애니메이션 부문 후보에 오르며 전 세계적 인정을 받았다. 그의 작품들은 가족, 성장, 시간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독창적인 판타지 세계관과 결합해 감동을 선사했다. 하지만 〈끝이 없는 스칼렛〉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불안정한 작품이다.


16세기 덴마크 왕국, 왕녀 '스칼렛'(아시다 마나 목소리)은 숙부 '클로디어스'(야쿠쇼 코지 목소리)가 아버지 '암렛'(이치무라 마사치카 목소리)을 역모의 죄로 몰아 처형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분노에 휩싸인 '스칼렛'은 몇 년간 검술을 연마하고, '클로디어스'의 술잔에 독을 타지만, 잔이 바뀌는 바람에 자신이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눈을 뜬 '스칼렛'은 삶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죽은 자들의 나라"에 있었다. 시공간을 초월한 이곳에는 중세 기사부터 현대인까지, 다양한 시대에서 온 망자들이 뒤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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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스칼렛'은 '클로디어스'가 망자들을 모아 군대를 이끌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복수를 완수하기 위해 사막과 전쟁터를 헤매던 그는 현대 일본에서 온 간호사 '히지리'(오카다 마사키 목소리)와 마주친다. 두 사람은 모든 면에서 대척점에 있다. '스칼렛'이 검을 휘두를 때, '히지리'는 적군의 상처를 치료한다. '스칼렛'이 복수에 매달릴 때, '히지리'는 "만약 네가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았다면 어땠을까?"라고 묻는다. 원한으로 가득한 '스칼렛'에게 '히지리'의 물음은 당황스럽지만, 두 사람은 이 기묘한 세계를 함께 통과한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코로나19 이후 세계의 지정학적 상황을 관찰하며 <끝이 없는 스칼렛>을 구상했다고 밝혔다. "요즘 사람들은 좀처럼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이런 추세가 우려를 낳고 있다"라는 그의 말처럼, 〈끝이 없는 스칼렛〉은 복수의 악순환을 끊고 용서로 나아가는 여정을 그리려 한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골격으로 삼되, 주인공이 "복수보다 더 중요한 것을 깨닫는" 방향으로 서사를 비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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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햄릿〉이라는 텍스트가 복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햄릿'의 방황, 광기, 주저함은 모두 복수라는 무게에서 비롯된다. 복수를 완수하지 못하는 내면의 갈등이 비극의 핵심이다. 그런데 호소다 마모루는 이 핵심 동력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채워 넣으려 한다. '스칼렛'은 '히지리'를 만나며 복수심이 누그러지고, 죽은 자들의 나라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힌다. 한 소녀(시로야마 노아 목소리)가 "내가 왕녀라면 모든 소녀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라고 말하자, '스칼렛'은 자신의 복수가 이기적이었음을 깨닫는다.

이런 변화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오히려 현재 세계가 필요로 하는 메시지일 수 있다. 하지만 <끝이 없는 스칼렛>은 이 전환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지 못한다. '스칼렛'의 내면 변화는 지나치게 급작스럽고, 용서에 이르는 과정은 피상적이다. 복수에 사로잡힌 인물이 '히지리'의 몇 마디 말과 소녀의 바람만으로 태도를 바꾸기엔, '스칼렛'이 짊어진 분노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아버지의 처형을 목격하고, 자신마저 독살당한 인물의 변화가 이토록 가볍게 그려질 때, 관객은 감정적 연결고리를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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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전례 없는 스케일을 구현했다. 죽은 자들의 나라는 끝없는 사막에서 현대 도시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용에서 거대한 전쟁 장면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화려한 비주얼 뒤에 서사의 중심은 약하다. 특히 3D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된 죽은 자들의 나라는 양날의 검이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CG도 많이 사용했지만, 손으로 그린 느낌 역시 보존하고자 노력했다"라고 밝혔지만, 결과물은 어색하다. 실사 세계를 2D로, 이세계를 3D로 구분한 연출 의도는 이해되지만, 캐릭터의 움직임과 배경 사이의 괴리감이 크다.

〈햄릿〉을 애니메이션으로 재해석한다는 발상은 충분히 흥미롭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도 의미 있다. 하지만 호소다 마모루는 〈햄릿〉이 가진 복수극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우면서, 그 자리를 채울 만큼 강력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복수를 버리고 용서를 말하려면, 그 용서가 왜 필요한지,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줘야 한다. 그렇게 〈끝이 없는 스칼렛〉은 그 숙제를 완수하지 못했다. ★★☆

2026/1/14 CGV 홍대


※ 영화 리뷰
- 제목 : <끝이 없는 스칼렛> (Scarlet, 2025)
- 개봉일 : 2026. 01. 14.
- 제작국 : 일본
- 러닝타임 : 111분
- 장르 : 애니메이션
-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호소다 마모루
- 목소리 출연 : 아시다 마나, 오카다 마사키, 야쿠쇼 코지, 야마지 카즈히로, 에모토 토키오 등
- 화면비율 : 2.3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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