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비디오 화면 보는 느낌의 디스토피아 이야기

[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48] <보이>

by 양미르 에디터
4977_5496_5752.jpg 사진 = 영화 '보이' ⓒ 영화특별시SMC

근미래, 정부 정책의 실패로 생겨난 '텍사스 온천'은 버려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디스토피아다. 이곳의 질서를 유지하는 '교한'(유인수)과 그의 동생 '로한'(조병규)은 찜질복을 '유니폼'으로 입은 입주자들에게 일감을 주고 '티켓'을 판다. 티켓을 손에 넣은 이들은 술과 마약으로 쾌락을 좇는다. 형제 위에는 카우보이 모자를 쓴 '모자장수'(서인국)가 있다. 채찍과 폭력으로 형제를 길들인 실질적 지배자다.


어느 날 '제인'(지니)이 엄마를 찾아 텍사스 온천에 입주한다. 핑크색 머리에 교복 같은 옷을 입은 '제인'은 이질적이다. '로한'은 '제인'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제인' 역시 '로한'의 호의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제인'의 엄마는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고, '교한'은 동생이 자신 몰래 약을 팔고 '제인'과 가까워지는 걸 목격한다. 배신감을 느낀 '교한'과 변화를 겪는 '로한' 사이에 균열이 생긴다. '모자장수'가 개입하면서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고, '로한'은 '제인'과 함께 탈출을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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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의 가장 큰 문제는 이상덕 감독이 디스토피아 영화를 만들면서 세계관 구축을 포기했다는 점이다. 기자간담회에서 이 감독은 "큰 이야기를 쓰겠다는 생각은 없었다"라면서, '로한'과 '제인'이 뛰어가는 이미지에서 출발했다고 했다. 이 고백이 모든 걸 설명한다. 감독에게 '텍사스 온천'은 살아 숨 쉬는 세계가 아니라 예쁜 장면을 찍기 위한 무대 장치였다.

디스토피아 장르의 핵심은 망가진 세계의 작동 원리를 보여주는 데 있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년)는 물과 기름이 지배하는 세계를, <설국열차>(2013년)는 계급이 칸으로 나뉜 폐쇄 시스템을 정교하게 그렸다. 관객은 그 세계의 규칙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에 몰입한다. 하지만 '텍사스 온천'은 애매하다. 찜질복이 '유니폼'이라는 설정은 시각적으로 재미있다. 하지만 왜 모두 같은 옷을 입어야 하는지, 이게 어떤 통제 시스템의 일부인지 설명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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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켓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목숨 걸고 원하는 티켓인데, 그게 뭘 할 수 있게 해주는지 모호하다. 술과 마약을 살 수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럼 티켓 없이는 아무것도 못 사는 건가? 화폐는 왜 따로 존재하나? 이런 질문들이 꼬리를 물지만 영화는 대답하지 않는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 세계가 왜 이렇게 됐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정부 정책 실패'라는 한 줄짜리 설정만 던져놓고 끝이다. 왜 사람들이 '텍사스 온천'에 모였나? 이곳은 정부가 방치한 구역인가? 아니면 불법 거주지인가? '모자장수'는 누구고, 어디서 권력을 얻었나? 이런 질문들이 사치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세계관의 기초다. 감독이 이걸 생략한 건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라는 예술적 선택이 아니라, 그냥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결과 텍사스 온천은 실제로 존재할 법한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뮤직비디오 촬영을 위한 세트장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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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묘사도 표면적이다. '로한'은 형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는데, 지적 능력의 문제인지 학습된 복종인지 명확하지 않다. 영화는 둘 다일 수도 있다는 식으로 애매하게 처리한다. 하지만 이건 연출의 미묘함이 아니라 캐릭터 설정의 나태함이다. 조병규는 열심히 연기하지만, '로한'이라는 인물의 내면이 비어 있으니 표현할 게 없다.

'제인'의 핑크 머리와 교복 스타일은 눈에 띈다. 그런데 왜 '제인'은 이런 차림으로 '텍사스 온천'에 왔을까? 엄마를 찾으러 위험한 곳에 가면서 눈에 띄는 옷을 입은 이유가 뭘까? 며칠간 안대를 했다가 벗는 장면도 있는데, 안대를 한 이유는 끝내 나오지 않는다. 이런 디테일들이 쌓이면서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멋진 화면을 위해 배치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모자장수'는 그나마 흥미로운 캐릭터다. 서인국의 연기도 좋다. 카우보이 차림에 채찍을 들고 등장하는 장면은 시각적 충격이 있다. 하지만 그가 왜 카우보이인지, '교한'과 '로한'을 어떻게 길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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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덕 감독은 뮤직비디오 출신답게 '한 장면 한 장면'을 완성도 있게 찍는 데는 능하다. 문제는 이 장면들을 영화라는 서사 구조 안에 배치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장면 전환이 갑작스럽고, 인물들의 감정 변화가 비논리적이다. 일례로, '제인'과 '로한'의 관계 발전은 이해하기 어렵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과정이 생략돼 있다. 한 장면에서 낯선 사이였다가 다음 장면에서 서로를 걱정하는 사이가 돼 있다. 사랑이 갑자기 찾아올 수도 있지만, 영화는 그 '갑자기'를 설득력 있게 보여줘야 한다. <보이>는 그냥 두 사람을 붙여놓고 관객이 감정선을 상상하길 바란다.

뮤직비디오는 노래가 서사를 대신한다. 가사와 멜로디가 감정을 전달하고, 영상은 그걸 시각화한다. 스토리가 없어도 된다. 캐릭터의 동기를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멋진 순간들을 이어 붙이면 된다. 하지만 영화는 다르다. 90분 동안 관객을 붙잡으려면 이야기가 필요하다. 인물의 여정이 필요하다. 세계관이 필요하다. 감독은 여전히 뮤직비디오를 만드는 방식으로 '상업 영화'를 찍었다. 멋진 장면들을 모아놓으면 영화가 될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장면의 합이 영화가 되는 건 아니다. 장면들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어야 하고, 그 연결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했다. ★☆


2026/01/17 메가박스 군자

※ 영화 리뷰
- 제목 : <보이> (Boy, 2026)
- 개봉일 : 2026. 01. 14.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90분
- 장르 : 범죄, 멜로/로맨스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이상덕
- 출연 : 조병규, 유인수, 지니, 서인국, 허지원 등
- 화면비율 : 1.33: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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