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에서 펼쳐진 권력 역전 스릴러

[별세개반이상만 #80] <직장상사 길들이기>

by 양미르 에디터


<직장상사 길들이기>는 과거 20세기 폭스의 로고로 시작합니다. 그 시절 영화들이 제시했던 공식, 특히 무인도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의 공식은 명확했죠. <귀부인과 승무원>(1974년), <블루 라군>(1980년), <식스 데이 세븐 나잇>(1998년) 등 남녀 주인공이 무인도에 표류하면 어김없이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66세의 악동 샘 레이미는 그 빈티지 로고를 소환한 순간부터 관습을 박살 낼 준비를 하고 있었죠. 한국 개봉 제목은 로맨틱 코미디를 연상시키지만, 원제인 'Send Help'(구조 요청)는 이 영화의 본질을 정확히 드러내죠. 이 영화는 로맨스가 아니라 생존 스릴러이며,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권력 투쟁입니다.

일반적인 무인도 로맨스가 전제하는 판타지는 단순한데요. 억압과 계급으로 상징되는 문명에서 해방의 자연으로, 그리고 진정한 사랑을 얻는다. 사회 시스템만 없으면 인간은 순수해지고, 계급과 편견이 사라진 자리에 진실한 감정이 싹튼다는 믿음. 그러나 샘 레이미의 답은 냉소적이죠. 문명도 지옥, 자연도 지옥입니다.

5015_5596_4454.jpg 사진 = 영화 '직장상사 길들이기' ⓒ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회사는 문명화된 폭력의 공간이죠. 전략기획팀 7년 차 '린다'(레이첼 맥아담스)는 유능하지만 촌스럽고, 똑똑하지만, 눈치 없고, 헌신적이지만 인정받지 못합니다. 새로 부임한 CEO '브래들리'(딜런 오브라이언)는 고인이 된 아버지가 약속한 '린다'의 승진을 무산시키고, 남자 대학 동문에게 그 자리를 넘기죠. "숫자는 잘 다루지만, 사교성이 부족하다"라는 게 이유였습니다. 참치샌드위치를 묻힌 채 사장실에 들어간 '린다'를 보며 '브래들리'는 노골적으로 역겨워하죠.


그러던 중 두 사람은 비행기 추락 사고로 무인도에 남겨집니다. 다리를 다친 '브래들리'는 성냥 하나 제대로 켤 줄 모르는 무능한 도련님으로 전락하고, 평소 서바이벌 리얼리티 <서바이버>의 열혈 팬이었던 '린다'는 불을 피우고, 집을 짓고, 멧돼지를 사냥합니다. 기존의 무인도 로맨스가 은폐해 온 질문은 이것인데요. 누가 사냥하고, 누가 요리하고, 누가 결정권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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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할리우드의 공식 속에서 남성은 주로 생존을 주도하고, 여성은 감정적 지지와 돌봄 노동을 제공하죠. 그리고 그 불균형은 로맨스로 포장됩니다. <직장상사 길들이기>는 그 권력 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죠. 생존 기술은 곧 권력인데요. '브래들리'가 골프 치던 부드러운 손은 무인도에서 아무 쓸모가 없고, '린다'의 <서바이버> 지식은 절대적 권위가 됩니다.

<노트북>(2004년), <어바웃 타임>(2013년)으로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으로 자리매김한 레이첼 맥아담스를 캐스팅한 것은 샘 레이미 감독의 가장 영리한 선택인데요. 관객은 조건반사적으로 기대합니다. "레이첼 맥아담스 + 무인도 = 로맨스" 그러나 영화는 그 기대를 배신하죠. 제작진은 레이첼 맥아담스를 '못난이'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일부 비평가들은 이것이 미스캐스팅이라고 지적합니다. 아무리 꾸며도 레이첼 맥아담스는 아름답고, 그래서 '린다'의 비호감 설정이 설득력을 잃는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샘 레이미의 의도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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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샘 레이미 감독 영화의 주인공들은 늘 무언가에 점령당했습니다. <이블 데드>(1981년)의 '애시'(브루스 캠벨)는 악령에, <스파이더맨 3>(2007년)의 '피터 파커'(토비 맥과이어)는 '심비오트'에, <드래그 미 투 헬>(2009년)의 '크리스틴'(앨리슨 로먼)은 저주에 잠식당하죠. 전작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2022년)에서도 '완다'(엘리자베스 올슨)는 흑마법 서적 '다크홀드'에 잠식당했습니다. <직장상사 길들이기>의 '린다'는 권력에 잠식당하는데요.

1막의 '린다'는 전형적인 피해자입니다. 승진을 빼앗기고, 오디션 테이프로 조롱당하고, 눈물을 삼키며 참는 여자죠. 2막에서 '린다'는 해방되는데요. 생존 기술로 '브래들리'를 압도하고, 정당한 권력 역전을 이뤄냅니다. 하지만 3막에서 '린다'는 선을 넘죠. '브래들리'를 '길들이기' 시작하면서, '린다'는 당근과 채찍을 전략적으로 사용합니다. 다정함은 무기가 되고, 돌봄은 지배의 도구가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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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섬뜩한 순간은 '브래들리'가 '린다'를 배신하고 독을 먹인 후에도, '린다'가 그를 다시 구하는 장면입니다. 왜일까요? 사랑해서? 다정해서? 아니죠. 권력을 놓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브래들리'가 죽으면 '린다'의 권력도 사라지죠. 지배할 대상이 없는 권력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정함이 약함은 아니다"라는 '린다'의 대사는 선언이 아니라 자기기만에 가깝죠. 샘 레이미 감독은 '린다'를 단순한 복수의 화신으로 그리지 않는데요. '린다'의 변화는 점진적이고, 그래서 더 무섭죠. 처음엔 정당한 자기방어, 그다음은 전략적 지배, 마지막엔 병적 집착. 권력은 악령처럼 서서히, 달콤하게 인간을 잠식합니다.

<직장상사 길들이기>를 둘러싼 가장 큰 아이러니는 <슬픔의 삼각형>(2022년)과의 관계인데요. 루벤 외스틀룬드의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은 부유한 승객들을 태운 유람선이 침몰하고, 무인도에서 청소부 '애비게일'(돌리 드 레옹)이 권력자가 되는 계급 역전극이었죠. 그래서 샘 레이미 감독이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에게 의도적으로 '답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루벤 외스틀룬드는 "권력은 누구든 부패시킨다"라고 말하고, 샘 레이미는 "그래도 '린다'는 질주한다"라고 답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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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삼각형>이 '암울한 열린 결말'로 끝난 가운데, '린다'는 '브래들리'를 잡은 후 고급 차를 타고 질주합니다. 이때 "어떤 식으로든 널 찾아내 잡을 거야"라는 블론디의 'One Way or Another'가 울려 퍼지죠. 이 노래는 '린다'의 승리를 축하하는 동시에, '린다'가 무엇이 되었는지를 폭로하는데요. 샘 레이미 감독은 이 질문에 답하지 않습니다. "'린다'는 승리하면서 자신을 잃은 게 아닐까요?" 확실한 건, 빈티지 '20세기 폭스' 시절 로고가 상징하던 할리우드 관습을 이 영화는 박살냈다는 것입니다. ★★★☆

2026/01/29 CGV 강변

※ 영화 리뷰
- 제목 : <직장상사 길들이기> (Send Help, 2026)
- 개봉일 : 2026. 01. 28.
- 제작국 : 미국
- 러닝타임 : 113분
- 장르 : 스릴러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샘 레이미
- 출연 : 레이첼 맥아담스, 딜런 오브라이언, 에딜 이스마일, 데니스 헤이스버트, 자비에르 사무엘 등
- 화면비율 : 2.39: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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