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 아래 무지개가 피어오를 때, 인간애를 느낀다

[별세개반이상만 #85] <아르코>

by 양미르 에디터

무지개는 언제나 비가 온 뒤에 뜹니다. 폭풍이 지나고, 하늘이 열리고, 빛이 물방울을 통과해야 비로소 그 색깔이 드러나죠. 우고 비엔베누 감독의 장편 데뷔작 <아르코>는 바로 그 원리로 작동하는 애니메이션 영화인데요. 기후 재앙과 인간 소외가 일상이 된 근미래를 배경으로, 인간이 서로를 향해 손을 내미는 순간들을 담아내죠. 잿빛 세계에서 무지개를 찾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무지개가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라, 먼 미래에서 시간을 건너온 누군가의 흔적이라면 어떨까요?

서기 2932년, 소년 '아르코'(오스카 트레사니니 목소리)는 구름 위에 세워진 공중 도시에서 삽니다. 지구가 스스로를 회복할 수 있도록 인류가 지상을 비워준 것이죠. 이 시대의 사람들은 무지개 망토를 두르고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 인류 역사를 관찰하는 일을 하는데요. '아르코'의 부모와 누나도 그렇게 과거를 오갑니다. 문제는 '아르코'가 아직 12살이 되지 않아 비행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인데요. 공룡이 보고 싶다는 충동 하나로, 가족이 잠든 밤 누나의 망토를 훔쳐 입은 '아르코'는 금지된 첫 비행에 나섭니다.

5129_5931_5434.jpg 사진 = 영화 '아르코' ⓒ 판씨네마(주)

착지 지점은 2075년. 태풍이 일상이 된 근미래 지구인데요. 투명 돔 '버블'이 집을 감싸 기후 재앙을 막아주고, 로봇이 육아와 노동 대부분을 맡아 처리하죠. '아르코'는 숲에서 정신을 잃은 채 발견되고, 또래 소녀 '아이리스'(마고 린가드 올드라 목소리)가 그를 거두어 집으로 데려갑니다. '아르코'를 뒤쫓는 수상한 삼형제의 추적 속에서, 두 아이는 '아르코'가 집으로 갈 수 있는 무지개를 찾아 모험에 나서죠.


'아이리스'는 <아르코>의 진짜 주인공인데요. '아르코'가 모험의 촉발자라면, '아이리스'는 그 모험의 이유죠. 홀로그램 속 부모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자란 '아이리스'의 일상에는 빈자리가 있습니다. 메워지지 않는 종류의 빈자리인데요. '아이리스'가 말이 없고 조심스러운 건 성격이 아니라 습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죠. '아르코'가 숲에 떨어지기 전까지 '아이리스'의 세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요. 무지갯빛 망토를 두른 낯선 소년의 등장은 '아이리스'에게 처음으로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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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는 '아이리스'에게 새의 언어를 가르쳐 주고, '아이리스'는 '아르코'에게 2075년을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죠. 서로 다른 시간에서 왔지만, 결핍의 언어는 같습니다. '아르코' 역시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는 외로움을 안고 있는데요. 둘의 교감은 설명 없이도 전해집니다. 우고 비엔베누 감독은 <아르코>의 진짜 악역을 특정 인물이나 사건이 아니라 세계의 구조 자체로 설정했죠. 상상이 설 자리를 잃고, 효율이 감각을 밀어낸 세계. 두 아이의 연대는 그 구조에 대한 가장 조용한 저항입니다.

외교관의 아들로 차드, 과테말라, 멕시코, 파리를 오가며 성장한 우고 비엔베누 감독은 14살 때 멕시코에서 본 <모노노케 히메>(1997년)로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빠졌는데요. 이후 그는 칼아츠에서 수학하며 프랑스에서 그래픽 아티스트로 활동했고,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의 공식 협업 아티스트로도 이름을 알렸죠. 해외 평단에서 "프랑스의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수식어가 붙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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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르코>의 비주얼은 지브리 오마주에 머물지 않습니다. 비엔베누 감독은 완벽하게 정제된 이미지보다 인간의 손끝에서 비롯된 미세한 흔적이 감정의 깊이를 만든다고 믿는데요. 디지털 기술에 의존하는 대신 실제 드로잉과 페인팅을 기반으로 화면을 설계했고, 그 결과 한 컷 한 컷이 그래픽 노블처럼 살아 숨 쉬는 비주얼이 완성됐죠.

비엔베누 감독은 팬데믹 기간을 거치며 SF 작가로서의 책임감을 새롭게 인식했다고 밝혔는데요. 파멸을 예언하는 장르적 관성에서 벗어나, 가능한 미래를 상상하겠다는 선언을 했고, 그 선언의 결과가 2932년이죠. 지상을 잃고도 인류는 구름 위에 집을 짓고, 멸종된 생물을 되살리러 과거로 떠나며, 여전히 서로를 사랑합니다. 2075년의 결핍과 균열이 결국 그 미래로 이어지는 경로가 된다는 것, 그 경로 위 어딘가에 '아이리스'의 선택이 있다는 것을 영화는 암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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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르코>는 완벽하지 않죠. 삼형제의 코믹 릴리프는 긴장감과 어울리지 않을 때가 있고, 시간여행의 내부 규칙은 끝까지 다소 불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남기는 것은 논리적 정합성이 아닌데요. 잿빛 하늘 아래에서도 무지개는 뜬다는 사실, 그 무지개가 먼 미래에서 보낸 누군가의 흔적일 수도 있다는 상상. 그리고 그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인간 사이의 온기라는 것. 그 감각이 극장을 나서는 발걸음에 조용히 달라붙습니다. ★★★☆

2025/11/28 씨네큐브 광화문


※ 영화 리뷰
- 제목 : <아르코> (Arco, 2026)
- 개봉일 : 2026. 03. 11.
- 제작국 : 프랑스
- 러닝타임 : 88분
- 장르 : 애니메이션
- 등급 : 전체 관람가
- 감독 : 우고 비엔베누
- 목소리 출연 : 오스카 트레사니니, 마고 린가드 올드라, 스완 아르라우드, 알마 요도로브스키, 빈센트 맥케인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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