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라기의 땅에서, 화석 아닌 신선한 영화 한 편을

[별세개반이상만 #87] <사랑, 우유, 그리고 치즈>

by 양미르 에디터

쥐라(Jura)는 지층 속에 새겨진 시간의 이름이기도 하고, 프랑스 동부의 산악 농촌 지역 이름이기도 합니다. 수억 년 전 이 땅의 지층이 '쥐라기'라는 지질 시대의 어원이 되었을 만큼, 쥐라는 오랜 것들의 고향이죠. 루이즈 크루보아제 감독의 장편 데뷔작 <사랑, 우유, 그리고 치즈>는 바로 이 땅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화석처럼 굳어 있지 않죠. 오히려 갓 짜낸 우유처럼, 아직 체온이 남아 있는 무언가를 화면에 담아냅니다.

열여덟 살 '토톤'(클레망 파보)의 여름은 처음엔 명료하게 무의미하죠. 동네 친구들과 파티를 전전하고, 만취해 쓰러지고, 여자를 꾀는 데 온 신경을 쏟습니다. 낙농가를 운영하는 아버지가 이른 아침부터 땀을 흘려도 아들은 관심이 없죠. 가업을 이을 생각도, 미래를 그릴 의지도 없는데요. 그저 지금 이 순간이 즐거우면 그만이죠.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갑작스러운 부재 앞에서 '토톤'에게 남겨진 것은 일곱 살짜리 여동생 '클레르'(루나 가렛), 이미 기울어진 농장, 그리고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자기 자신인데요.

5164_6039_2610.jpg 사진 = 영화 '사랑, 우유, 그리고 치즈' ⓒ 필름다빈

막막한 생계 앞에서 '토톤'이 꺼내 든 카드는 황당하지만 간절하죠. 우승 상금 30,000유로가 걸린 지역 콩테 치즈 경연 대회. 문제는 그가 치즈를 만들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평생 낙농업에 종사했지만, 아들은 그 곁에서 배운 것이 없죠. 트랙터는 이미 팔았고, 젖소도 없는데요.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어 짜낸 해결책은 아르바이트 중 눈이 맞은 인근 목장의 딸 '마리리즈'(마이웬 바르텔레미)를 꾀어 자리를 비운 사이, 친구들이 그 목장의 최상급 우유를 몰래 빼돌리는 것인데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이 계획은 실수를 거듭하면서도 묘하게 굴러가기 시작합니다.


루이즈 크루보아제 감독은 열다섯 살에 떠난 고향 쥐라로 돌아와 이 영화를 만들었는데요. 출연진 전원이 비전문 배우로, 감독은 쥐라 지역의 모터크로스 경기, 스톡카 경주, 농업 박람회를 직접 돌며 배우들을 찾았죠. '토톤' 역의 클레망 파보는 실제 양계 농장에서 일하던 열여덟 살 청년으로 농업 고등학교에서 발굴됐고, '클레르' 역의 루나 가렛은 감독이 같은 마을에서 자라는 모습을 지켜봐 온 소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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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리즈' 역의 마이웬 바르텔레미는 오디션 당시 농업을 전공하는 학생이었죠. 이들이 화면 앞에 섰을 때 풍기는 질감은 연기 훈련으로는 만들기 어려운 종류의 것인데요. 자신이 살아온 땅에서, 자신이 아는 언어로, 자신과 닮은 인물을 연기하는 사람의 자연스러움이 영화 전체를 받쳐줍니다.

크루보아제 감독은 고향을 낭만화하지 않는데요. 쥐라의 들판은 분명 아름답지만, 카메라는 관광객의 시선으로 풍경을 소비하지 않죠. 형제끼리 젖소 한 마리를 번갈아 돌봐야 하는 인근 농가, 휴일도 없이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밤 열 시까지 일하는 '마리리즈'의 일상, 남매가 버려진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지는 장면이 아름다운 자연광과 아무렇지 않게 병치됩니다. 프랑스도 예외가 아닌 농촌 공동화, 청년 농업 인력 부족이라는 현실이 유쾌한 서사 사이사이에 조용히 끼어들죠. 오랜 전통의 콩테 치즈를 정작 그 고장 출신 청년은 만들 줄 모른다는 사실 자체가, 감독이 포착한 균열의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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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영화의 결말은 판타지를 허락하지 않는데요. 그럼에도 영화가 쓸쓸하지 않은 것은, 감독이 '성장'을 성공의 서사로 그리지 않기 때문이죠. '토톤'이 통과해야 하는 마지막 관문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는 것인데요. 화려하지 않지만, 그것이 이 영화가 말하는 어른이 되는 방식입니다. 이 영화가 77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젊은 관객이 선정한 작품상인 '유스상'을 받은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죠. 가장 오래된 땅에서 가장 젊은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

2024/10/04 CGV 센텀시티
-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상영작


※ 영화 리뷰
- 제목 : <사랑, 우유, 그리고 치즈> (Holy Cow, 2024)
- 개봉일 : 2026. 03. 25.
- 제작국 : 프랑스
- 러닝타임 : 92분
- 장르 : 코미디, 드라마
-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 감독 : 루이즈 크루보아제
- 출연 : 클레망 파보, 루나 가렛, 마이웬 바르텔레미, 디미트리 보드리, 마티스 버나드 등
- 화면비율 : 2.39: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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