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67] <술타나의 꿈>
영화가 끝나고 남은 건 황홀한 잔상이 아니었다. 씁쓸함이었다. 이사벨 에르구에라의 장편 데뷔작 <술타나의 꿈>은 세계 3대 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인 안시, 자그레브, 오타와를 휩쓸며 "올해 가장 눈에 띄는 애니메이션 성취"라는 찬사를 받은 작품이다. 그 찬사가 틀리지 않았다는 건 극장을 나오면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억에 남는 건 찬란했던 화면이 아니라, 그 화면이 말없이 건네는 질문이었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말 무엇이 바뀌었는가.
스페인의 예술가 '이네스'(미렌 아리에타 목소리)는 관계 정리를 위해 인도로 향한다. 그곳에서 우연히 손에 넣은 한 권의 소설. 1905년 인도 벵골의 작가이자 교육자인 베굼 로케야 사카와트 호사인이 쓴 '술타나의 꿈'이다. 소설 속에는 '레이디랜드'라는 유토피아가 펼쳐진다. 폭력적인 남성들은 집 안에 격리되고, 여성들이 나라를 다스리며, 하루 두 시간만 일해도 되고, 전쟁을 즉각 끝낼 수 있는 기계가 존재하는 세계다. '이네스'는 이 소설에 매료되어 작가 호사인의 삶과 자신의 여정을 하나로 엮어내기로 결심한다. 영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이야기는 세 겹으로 쌓인다. 현재의 '이네스'가 인도 전역을 여행하며 자신의 삶과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는 층위, 20세기 초 인도를 살았던 '호사인'의 전기적 삶의 층위, 그리고 소설 속 유토피아 '레이디랜드'의 층위. 이사벨 에르구에라 감독은 이 세 층위를 각기 다른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구분해 시각화했다. '이네스'의 여정에는 아날로그 수채화 배경 위에 디지털로 제작된 인물이 얹히고, '호사인'의 삶은 그림자 인형극을 연상시키는 컷아웃 기법으로 재현된다. '레이디랜드'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영역이었던 메헨디(헤나 타투) 스타일의 정교한 패턴으로 구현된다. 특히 메헨디 시퀀스는 인도 여성 노동자 협동조합 SEWA와 실제 메헨디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으로 완성되었으며, 에르구에라 감독은 이를 '호사인'에게 바치는 헌사라고 밝혔다.
10년 이상의 제작 기간은 이 세 겹의 층위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2005년부터 인도, 중국, 독일 등지에서 애니메이션을 가르치며 쌓아온 에르구에라 감독의 경험은 서구의 시선으로 동양의 이야기를 재단하지 않으려는 의식적인 선택으로 이어졌다. 각 문화권의 고유한 시각적 언어를 찾아 적용했다는 감독의 언급처럼, 세 가지 기법의 병용은 단순한 시각적 다양성의 추구가 아니라 이야기의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존중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술타나의 꿈>은 완벽하지 않다. 구성이 산만하고, 일부 캐릭터의 존재 이유가 모호하며, 메시지 전달이 지나치게 직접적인 지점도 있다. 그 불완전함 앞에서 잠시 멈추게 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불완전함이 작품의 주제와 어딘가 공명한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여성들의 꿈과 현실이 완전히 일치할 수 없듯, 그 꿈을 담은 영화 또한 정갈하게 완성될 수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결함은 있지만 그것이 이 영화를 무너뜨리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씁쓸함의 출처를 생각해봤다. 1905년 호사인이 상상 속에 그린 '레이디랜드'는 당시 인도 현실의 정반대였다. 여성이 억압받는 세계에 맞서기 위해 글 속에서라도 뒤집어놓은 세계였다. 그리고 지금, '이네스'가 그 소설을 손에 쥐고 서 있는 2023년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꿈속에서만, 소설 속에서만, 혹은 영화 속 환상의 시퀀스 속에서만 온전히 숨 쉬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100년을 건너 반복된다. 영화가 끝난 뒤 느끼는 씁쓸함은 그러므로 감동의 반대편에 있는 감정이 아니다. 꿈과 현실이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끝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될 때 생기는, 조금 더 무거운 종류의 감동이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혁명의 완성이 아니라 혁명의 가능성이다. 1905년 호사인이 글로 그려낸 '레이디랜드'가 현재 '이네스'의 영상으로 재탄생하는 순간, 꿈은 또 다른 꿈을 낳는다. 그 연쇄를 바라보는 마음이 마냥 밝지 않은 건, 꿈이 꿈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현실의 무게를 증언하기 때문이다. ★★★
2025/08/23 메가박스 신촌
- 제27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SIWFF) 상영작
※ 영화 리뷰
- 제목 : <술타나의 꿈> (Sultana's Dream, 2023)
- 개봉일 : 2026. 04. 01.
- 제작국 : 스페인
- 러닝타임 : 87분
- 장르 : 애니메이션
-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이사벨 에르구에라
- 목소리 출연 : 매리 비어드, 미렌 아리에타, 미레아 가빌론도, 마우리치오 파라오, 마누 쿠라나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