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지에 나가는 정치인들의 심정을 차곡차곡 담는 카메라

[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73] <빨간 나라를 보았니>

by 양미르 에디터
5213_6153_5259.jpg 사진 = 영화 '빨간 나라를 보았니' ⓒ (주)트리플픽쳐스

카메라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따라간다. 유세 현장에서 후보가 웃으며 내민 손이 허공에 머무는 순간, 외면하며 지나치는 모습. 그래도 다음 사람에게 다시 손을 내미는 후보의 얼굴. 홍주현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빨간 나라를 보았니>가 택한 방식은 바로 이것이다. 해설도, 판단도 없이 그저 옆에 있는 것. 20년 넘게 <한국인의 밥상>, <VJ특공대>, <인간극장>의 방송작가로 활동한 감독에게 사람을 오래 들여다보는 일은 이미 몸에 밴 습관이었을 테다. 그 습관이 이번엔 경상북도의 선거판으로 향했다.


<빨간 나라를 보았니>는 두 개의 선거를 축으로 삼는다. 2022년 6월 전국지방동시선거, 그리고 2024년 4월 국회의원선거. 직전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가 당선된 직후 치러진 첫 선거, 경북은 그야말로 '사지'였다. 국민의힘 현직 이철우 경북도지사의 무투표 당선이 거론되던 시점, 경북의 유일한 더불어민주당 도의원이었던 임미애가 급히 후보로 나선다. 모두가 말렸다. 이기는 선거가 아니라는 걸 본인도 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다 이기는 선거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봐요"라는 말을 남기고 유세 현장에 뛰어든다. 명함을 거부당하고, 조롱 섞인 한마디에 힘이 빠지면서도 그는 계속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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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카메라는 다시 경북으로 돌아온다. 2년 사이 정치 지형은 흔들렸다. 윤석열 정부 실정 여파로 민주당의 반등이 예상되는 분위기였지만, 경북만은 달랐다. 보수 결집의 역풍이 분다는 관측 속에서 경북 각지에 민주당 후보들이 다시 출마한다. 임미애의 남편 김현권은 구미시에서 20년 정치 인생의 마지막 도전을 선언한다. 경북 의성에서 농민으로 살아온 그는 "세상을 바꾸는 가장 빠른 방법은 내가 바뀌는 거예요"라고 말한다.

영주·봉화·영양에는 임종득 후보의 무투표 당선을 막기 위해 박규환이 추대 출마하고, 씨족 문화가 뿌리 깊은 안동에서는 "좋아, 죽더라도 한번 뛰어 보자"는 김상우가 뛴다. 이기지 못할 걸 알면서 나온 사람들이, 그래도 이번엔 다를 것 같다는 기분으로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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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현 감독이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건 2022년 5월, 구미에 사는 친구의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친구는 경북 도지사 후보로 나온 여자가 "여자 노무현 같다"고 했다. 그 말이 감독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들은 스타가 아니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존재들. 역사에 길이 남거나 뜨거운 칭찬을 받지도 못할 사라지는 선거 패자들." 감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카메라를 들었다. 민주당원도, 민주당 지지자도 아닌 사람이 경상북도로 향한 것이다.

4년에 걸친 촬영 기간 내내 제작진은 후보들과 같이 뛰고, 같이 걸었다. 그 밀착이 영화의 질감을 만든다. 여론조사 수치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김현권의 표정, 동네 봉사 활동조차 참여하기 어렵다는 운동원의 울분, 민주당 깃발 하나 때문에 이웃과 멀어지고 경제적 불이익까지 감수해야 한다는 억울함을 삼키다 끝내 눈물을 훔치는 후보. 감독은 이 장면들에 어떤 해설도 덧붙이지 않는다. 단지 카메라를 들이댄다. 심정이 쌓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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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이 영화의 미덕은, 동시에 한계이기도 하다. <빨간 나라를 보았니>는 경북의 구조를 해부하거나 지역주의의 원인을 따지는 영화가 아니다. 감독 스스로 "심각한 정치적 구호나 심판의 간절함, 상대를 적으로 여기는 투쟁의 영역에 있지 않기를 바랐다"라고 밝혔다. 그 선언은 영화의 성격을 규정한다. 이 영화는 분석하지 않는다. 대신 느끼게 한다. 40년 가까이 한 정당이 독식해온 지역의 풍경을, 그 안에서 거름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얼굴을 통해 전달한다. "제가 이 지역에 꽃은 되지 못하더라도 거름은 될 거다"라는 정석원의 말이, 설명 없이도 묵직하게 남는 이유다.

영화는 결과를 숨기지 않는다. 2024년 총선, 경북은 여전히 보수 아성으로 서 있다. 각자의 방식으로 패배를 받아들인다. 어떤 이는 등을 돌리고, 어떤 이는 다음을 말한다. 임미애는 비례대표로 제22대 국회의원이 됐다. 감독은 이 결말을 담담하게 놓아둔다. 승리의 서사로 포장하지도, 패배의 비극으로 마무리 짓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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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카메라의 솜씨는 분명 믿을 만하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뒤 남는 건 연민에 가깝다. 경북의 구조를 건드리거나, 이 반복적 패배가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파고드는 시선은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이 감독의 선택이라면 존중할 수 있다. 다만 관객으로서는, 더 깊이 들어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유효한 이유는 있다. 조명받지 못한 광장이 있다는 것, 지는 싸움에 기꺼이 나선 사람들의 존재가 한국 민주주의의 또 다른 층위를 이룬다는 것 말이다. ★★★


※ 영화 리뷰
- 제목 : <빨간 나라를 보았니> (Have You Seen the Land of the Red?, 2026)
- 개봉일 : 2026. 04. 15.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117분
- 장르 : 다큐멘터리
-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홍주현
- 출연 : 김현권, 임미애, 배영애, 정석원, 이영수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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