갭 모에에 빠져버린 웨스 앤더슨의 세계

[별세개반이상만 #43] <페니키안 스킴>

by 양미르 에디터

1950년대, 6번의 비행기 추락 사고와 숱한 암살 위협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거물 사업가 '자자 코다'(베니시오 델 토로)는 자신의 일생일대 프로젝트인 '페니키안 스킴'이 위기에 처하자 중대한 결단을 내립니다. 아홉 명의 아들을 제쳐두고 6년간 연락하지 않았던 외동딸 '리즐'(미아 트리플턴)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것이죠. 종신 서약을 한 달 앞둔 수련수녀였던 '리즐'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혼란스러워하지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은 마음과 함께 이 위험한 여정에 동참하게 됩니다.

'자자'는 '리즐'과 함께 자신의 가정교사로 고용된 노르웨이 출신 곤충학자 '비욘'(마이클 세라)을 데리고 '페니키아' 곳곳을 누비며 주요 동업자들을 만나 '갭'을 메우기 위한 협상에 나서죠. 하지만 이 협상들은 일반적인 비즈니스 미팅과는 거리가 멀죠. 농구 자유투 게임으로 승부를 결정하거나, 게릴라들의 습격 속에서 총알을 대신 맞아주거나, 수류탄을 선물로 건네며 위협 아닌 위협을 가하는 식입니다.

4400_3579_3626.jpg 사진 = 영화 '페니키안 스킴' ⓒ 유니버설 픽쳐스

그 과정에서 '리즐'은 단순히 아버지의 사업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부정한 방법으로 쌓아온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죠. 그리고 마침내 모든 '갭'을 메우기 위해서는 '자자'의 이복동생이자 암살 시도의 배후인 '누바'(베네딕트 컴버배치)와 최종 대결을 펼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갭 모에'라는 용어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일본에서 시작된 이 개념은 캐릭터의 평상시 모습과 전혀 다른 의외의 모습 사이의 차이에서 느끼는 매력을 뜻하죠. 예를 들어, 평소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 갑자기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나, 강인해 보이는 사람이 작은 것을 무서워하는 모습에서 오는 귀여운 반전 매력 말입니다. 웨스 앤더슨의 신작 <페니키안 스킴>을 보며, 그가 갭 모에에 빠져버린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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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이 영화에서 '갭(Gap)'은 단순히 갭 모에의 '갭'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인공 '자자 코다'가 '페니키안 스킴'이라는 거대 프로젝트에서 직면한 '자금 부족분'을 뜻하는 핵심 개념이기도 합니다. 경쟁 컨소시엄의 원자재 가격 조작으로 인해 발생한 경제적 '갭'을 메우기 위한 여정이 이 영화의 골격인데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자자'가 사업상의 '갭'을 메워갈수록 딸 '리즐'과의 감정적 '갭'은 오히려 좁혀지는 역설적 구조를 보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웨스 앤더슨은 관객들을 갖가지 갭 모에의 향연 속으로 빠뜨리죠.

우선 주인공 '자자 코다'부터가 갭 모에의 결정체입니다. 유럽 최고의 부자이자 냉혹한 사업가로 소개되지만, 그는 욕조에서 여유롭게 시가를 피우며 책을 읽고, 추락 직전의 비행기에서도 태연하게 식물학 서적에 몰두하죠. 6번의 추락 사고에도 "나는 전혀 불안하지 않다"고 되뇌며 자신에게 주문을 거는 모습은 코믹하면서도 어딘지 애처로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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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즐'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종신 서약을 앞둔 경건한 수련수녀라는 설정이지만, '리즐'이 가지고 다니는 것은 보석으로 장식된 묵주와 화려한 단검이죠. 상냥해 보이지만 위험한 순간에는 주저 없이 칼을 꺼내들고, 아버지만큼이나 냉소적이고 독특한 면모를 드러냅니다. 케이트 윈슬렛의 딸인 미아 트리플턴은 이런 복합적인 캐릭터를 능숙하게 소화해내며 강한 인상을 남기죠.

'비욘' 역시 평범한 곤충학자가 아닙니다. 어린 시절부터 비닐봉지에 벼룩을 넣어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것을 즐겼다는 설정부터 범상치 않은데, '리즐'에게 한눈에 반해 어설픈 구애를 펼치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죠. 하지만 후반부에 밝혀지는 그의 정체는 또 다른 반전을 선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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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 앤더슨 감독의 첫 첩보 스릴러 도전이라는 점도 일종의 갭 모에인데요. 하지만 그가 만든 첩보극은 기존 첩보 영화와는 다르죠. 암살자들이 등장하고 총격전이 벌어지지만, 모든 것이 동화책 속 이야기처럼 아름답고 우아하게 펼쳐집니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등장인물들은 마치 연극 무대 위의 배우들처럼 절제된 연기를 보여주고, 폭력적인 장면조차 소동극처럼 귀엽게 표현되죠. 결국, '자자'는 경제적 갭은 벌어지나, 오히려 더 큰 것을 얻게 되는데요.

이는 웨스 앤더슨 감독이 줄곧 추구해 온 주제의식과도 맞닿아 있죠. 겉으로는 화려하고 성공적으로 보이는 삶보다, 진정한 관계와 소통이 주는 따뜻함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 말입니다. '자자'와 '리즐'이 카드게임을 하며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진정한 갭이 메워진 순간을 목격할 수 있죠. 그렇게 <페니키안 스킴>은 첩보 스릴러라는 장르적 포장 속에 가족 드라마와 성장담, 블랙 코미디가 절묘하게 혼재되어 있고, 매 순간 예상을 뒤엎는 반전 매력이 넘치는 작품이 됐습니다. ★★★☆

2025/05/31 CGV 왕십리

※ 영화 리뷰
- 제목 : <페니키안 스킴> (The Phoenician Scheme, 2025)
- 개봉일 : 2025. 05. 28.
- 제작국 : 미국
- 러닝타임 : 101분
- 장르 : 드라마, 코미디
- 등급 : 15세 관람가
- 감독 : 웨스 앤더슨
- 출연 : 베니시오 델 토로, 미아 트리플턴, 마이클 세라, 리즈 아메드, 톰 행크스 등
- 화면비율 : 1.50: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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