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개반이상만 #42] <신성한 나무의 씨앗>
이란 테헤란의 혁명수비대 법원에서 20년간 성실하게 일해온 '이만'(미삭 자레)에게 꿈에 그리던 승진 소식이 찾아옵니다. 수사판사라는 새로운 지위에 가족 모두가 기뻐하지만, 때마침 터진 대규모 히잡 반대 시위가 이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일상을 뒤흔들기 시작하죠. '이만'의 주요 업무는 시위 참가자들에게 사형을 포함한 중형을 선고하는 것인데요. 법률적 판단이 아닌, 정권의 명령에 따른 도장 찍기에 불과한 일이었죠.
한편 '이만'의 두 딸 '레즈반'(마흐사 로스타미)과 '사나'(세타레 말레키)는 SNS를 통해 정부가 은폐하려는 시위의 진실을 목격합니다. 친구가 시위 중 산탄총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집으로 피해오면서 갈등은 표면화되죠. 아내 '나즈메'(소헤일라 골레스타니)는 남편의 출세를 지키기 위해 딸들을 통제하려 하지만, 가족 식사에서 결국 폭발이 일어납니다. 딸들이 아버지의 업무를 정면으로 문제 삼자, '이만'은 자신이 국가와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며 분노하죠. 그날 밤, '이만'은 법원에서 지급받은 호신용 총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이 순간부터 영화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드러냅니다.
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의 <신성한 나무의 씨앗>을 보며 가장 강렬하게 느낀 것은 바로 이 급격한 장르적 전환이었죠. 총이 사라지기 전까지 영화는 분명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이란 현실 고발 영화'의 문법을 따릅니다. 히잡 시위, 가족 내 이념 갈등, 수사판사의 도덕적 딜레마 등 사회정치적 드라마의 전형적 요소들이 차근차근 쌓여가죠.
하지만 총이 사라지는 순간, 영화는 관객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끌고 갑니다. '이만'의 의심은 가족을 향하고, 그는 마치 수사관처럼 가족을 심문하기 시작하는데요. 사랑하는 딸들을 바라보던 자상한 눈빛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의심과 불신, 통제욕이 자리하죠. 급기야 정치범 전문 수사관에게 가족을 맡겨 안대를 씌우고 심문받게 하는 장면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온라인에 신상이 털리자, 가족을 산속 별장으로 데려가 감금하는 후반부는 <샤이닝>(1980년)의 '잭 토런스'(잭 니콜슨)를 강하게 연상시키죠. 가족을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가족을 가장 위험에 빠뜨리는 광기어린 아버지의 모습은 소름끼칠 정도입니다. 캠코더를 켜놓고 자백을 강요하며 재판하듯 행동하는 '이만'의 모습에서, 관객은 더 이상 사회정치 드라마가 아닌 심리 스릴러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죠.
이 급격한 변화가 주는 충격은 단편적인 연출 기교가 아닙니다. 권력이 개인을 어떻게 괴물로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효과적인 방법론이죠. 감독은 영화의 출발점이 2022년 감옥에서 들은 한 고위 간부의 고백이었다고 전했는데요. 체제에 협력한 것 때문에 가족들과의 관계가 악화해 자살 충동까지 겪고 있다는 그의 말에서 감독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결심했죠.
영화에서 '총'은 소품이라기보다는 권력 자체의 은유인데요. 감독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총은 더 넓은 의미에서 권력에 대한 은유이며, 동시에 이야기 속 인물들의 숨겨진 비밀을 드러나게 하는 계기"라고 설명했습니다. 총을 잃어버린 '이만'의 광기 어린 변화는 권력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개인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죠.
이 변화가 점진적이지 않고 급작스럽다는 점이 더욱 무섭습니다. 권력의 폭력성이 얼마나 일상을 순식간에 파괴할 수 있는지를 체감하게 만들죠.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가족을 가장 위험에 빠뜨리는 모순적 상황은, 국민을 보호한다며 국민을 탄압하는 권력의 논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영화 제목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감독이 이란 남부 섬에서 본 인도보리수에서 따온 것인데요. 이 나무의 씨앗은 다른 나무 가지 위에 떨어져 발아한 후, 뿌리가 땅에 닿으면 숙주 나무를 서서히 감아 올라가며 결국 질식시키죠. 감독은 이를 통해 젊은 세대가 기존 체제를 대체해 나가는 과정을 은유했는데요.
'레즈반'과 '사나'로 대표되는 딸들은 아버지의 변화에 굴복하지 않죠. 이들은 기존 권위에 맞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냅니다. 감독은 "새로운 세대는 억압자들을 마주하는 방식으로 전혀 다른, 더 열려 있는 길을 선택하고 있다"며 이들에 대한 희망을 표현했죠.
영화의 메시지는 제작 과정 자체에서도 완성됐습니다. 라술로프 감독은 정부의 검열을 피해 이 영화를 만들어야 했는데요. 가짜 시놉시스를 만들고, 단편영화처럼 위장하며 캐스팅을 진행했죠. 촬영은 대부분 실내에서 이뤄졌고, 외부 촬영 시에는 국영방송 스타일로 위장했습니다. 심지어 행인들이 배우에게 정권에 협력한다며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는 뒷이야기는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죠.
한편, 영화 완성 후의 현실은 더 극적이었습니다.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특별상을 받고,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후보에 올랐음에도, 감독은 8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망명길에 올랐죠. '나즈메' 역의 소헤일라 골레스타니는 영화 출연을 이유로 태형 74대와 징역 1년형을 선고받을 위기에 처해 현재 테헤란 자택에 연금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레즈반'과 '사나', '사다프'(니우샤 아크시) 역의 젊은 배우들은 가족을 남겨둔 채 이란을 탈출해 베를린에서 함께 살고 있는데요.
극중 세 모녀가 아버지의 권위에 맞서는 것처럼, 현실의 배우들도 체제에 맞서 자유를 선택한 것이죠. 예술이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예술이 하나가 되어 저항의 의미를 완성한 셈이 됐습니다. ★★★★
2025/05/24 CGV 용산아이파크몰
※ 영화 리뷰
- 제목 : <신성한 나무의 씨앗> (The Seed of the Sacred Fig, 2024)
- 개봉일 : 2025. 06. 03.
- 제작국 : 독일
- 러닝타임 : 167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5세 관람가
- 감독 : 모함마드 라술로프
- 출연 : 미삭 자레, 소헤일라 골레스타니, 마흐사 로스타미, 세타레 말레키, 니우샤 아크시 등
- 화면비율 : 2.3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