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동하는 우정·흔들리는 사회, 영화가 던진 불편한 질문

[별세개반이상만 #36] <해피엔드>

by 양미르 에디터

점멸등이 깜빡이는 어두운 화면으로 시작하는 <해피엔드>는 그 제목과는 모순되는 불안한 분위기로 관객을 맞이합니다. "낡은 틀에 사람을 가두는 세력이 술렁인다. 풍화된 건물이 평소보다 더 삐걱댄다. 사람들을 구분 짓는 체계가 붕괴 중인 일본에서 뭔가 크게 달라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라는 영화의 첫 자막은 마치 조지 오웰의 <1984>를 연상시키는 디스토피아적 세계의 서막을 알리죠. 하지만 이 세계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조금 앞, 근미래의 일본이죠.

영화는 근미래 도쿄를 배경으로 고등학생 '유타'(쿠리하라 하야토)와 '코우'(히다카 유키토)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어릴 적부터 단짝으로 지내온 두 사람은 음악에 빠져 학교 음악연구 동아리에서 '아타'(하야시 유타), '밍'(시나 펭), '톰'(아라지)과 함께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죠. 이들은 종종 야간에 학교에 몰래 잠입해 음악을 듣고 놀기도 하는데요. 어느 날 밤, 누군가가 친구들이 잠든 사이 장난기가 발동해 교장 '나가이'(사노 시로)의 고급 스포츠카를 수직으로 세워두는 발칙한 장난을 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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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소한 장난은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낳습니다. 분노한 학교 측은 범인을 찾기 위해 AI 감시 시스템 '판옵티'를 도입하죠. 복도마다 카메라가 설치되고 학생들은 24시간 감시당하며, 규칙 위반 시 자동으로 벌점이 부과되는데요. 동시에 학교 밖 사회는 대지진의 위협을 명목으로 총리가 '대국민 긴급사태조항'을 선포하며 통제를 강화하죠. 거리에는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지고, 재일 외국인과 이민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유타'와 '코우'의 관계는 서서히 균열을 일으키죠. 4대째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한국인 '코우'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부조리에 눈을 뜨기 시작하고, 열정적인 운동가 '후미'(이노리 키라라)의 영향으로 정치적 의식이 깨어납니다. 반면 부유한 일본인 가정에서 자란 '유타'는 여전히 음악과 친구들만 중요하게 생각하며 현실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죠. 끊임없이 발생하는 지진의 진동처럼, 두 사람의 우정 역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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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조지 오웰의 고전 소설 <1984>는 빅브라더로 상징되는 전체주의 정권이 시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디스토피아 사회를 그려냈는데요. 소설 속 주인공 '윈스턴'이 감시와 억압에 몰래 저항하다 결국 시스템에 굴복하게 되는 암울한 서사처럼, <해피엔드>는 이러한 감시 사회의 본질을 현대적 맥락으로 옮겨와 더욱 교묘하고 일상적인, 그래서 더 섬뜩한 통제 체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학교의 AI 시스템은 '너희를 위한 것'이라는 명목하에 도입되지만, 실상은 통제와 억압의 수단에 불과하죠. 이는 현대 사회가 '안전'과 '편의'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자유를 조금씩 양보받는 현실과 놀랍도록 닮아있습니다.

더 주목할 부분은 영화가 보여주는 일본 특유의 사회적 맥락인데요. 지진의 공포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은 역사적으로 일본에서 실제 일어났던 일들을 상기시키죠. 네오 소라 감독은 인터뷰에서 "일본에서는 대규모 지진이 사회적 전환점으로 작용해 왔다"라며, "1923년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넣고 있다'는 거짓 소문으로 집단학살이 일어났고, 오늘날에도 큰 지진이 발생할 때마다 '외국인들이 우물에 독을 퍼트린다'는 거짓 정보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진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처럼 영화는 재난을 차별과 혐오의 도구로 활용하는 역사적 패턴을 비판적으로 조명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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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드>의 가장 큰 성취는 10대들의 성장담을 통해 날카로운 사회 비평을 담아낸 방식인데요. 표면적으로는 우정과 성장을 그린 청춘물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현대 사회의 억압적 시스템과 차별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이에 대항하는 젊은이들의 각성과 저항이 자리 잡고 있죠.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완전한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인데요. 영화 초반 동아리방의 미러볼이 모두를 비추다가 후반부에는 쓸쓸한 '유타'의 얼굴만 비추는 장면은 우정의 상실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죠.

제목 <해피엔드>의 역설적 의미도 여기서 드러나는데요. 네오 소라 감독은 "행복(happy)과 끝(end)이라는 단어는 절대적으로 모순되지는 않지만 서로 대립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며, "영화 전반적으로 두려움과 불행에 대한 감각이 둘러싸고 있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고, 동시에 젊음의 기쁨과 에너지를 함께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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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에는 항상 허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들로, 감시 카메라의 사각지대를 활용하는 학생들, 야구부 주장이 '유타' 대신 벌점을 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완벽한 통제란 불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죠. 학생들의 항의로 감시 시스템 철회가 논의되기 시작하는 것처럼, 사회도 조금씩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을 영화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네오 소라 감독의 첫 장편 극영화가 베니스국제영화제, 토론토국제영화제 등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이유는 분명하죠. 일본을 넘어 전 세계가 직면한 문제들을 담아낸 <해피엔드>는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지지만, 그 질문과 마주할 용기를 주는 영화인데요. 우리는 모두 흔들리는 땅 위에 서 있지만, 그곳에서도 함께라면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죠.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진정한 <해피엔드>를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

2025/04/17 CGV 용산아이파크몰

※ 영화 리뷰
- 제목 : <해피엔드> (Happyend, 2024)
- 개봉일 : 2025. 04. 30.
- 제작국 : 일본
- 러닝타임 : 113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네오 소라
- 출연 : 쿠리하라 하야토, 히다카 유키토, 하야시 유타, 시나 펭, 아라지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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