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개반이상만 #35] <달팽이의 회고록>
"달팽이처럼 느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힘은, 엉뚱하지만, 선한 마음 속에 늘 존재한다." <달팽이의 회고록>을 보고 난 후 남긴 한 줄 후기였는데요. 영화를 관람하고 깊은 생각에 잠기며, '그레이스'의 여정과 애덤 엘리어트 감독의 메시지를 하나의 문장으로 응축해 보고자 했죠. 챗GPT와 AI가 몇 초 만에 완벽한 이미지를 생성하는 시대, 8년이라는 시간 동안 7,000개의 오브제와 135,000장의 사진을 통해 만들어진 이 애니메이션은 그 자체로 역설적인 존재입니다.
'그레이스'(사라 스누크 목소리)의 삶은 비극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선천성 구개열을 지닌 채 태어난 '그레이스'는 태어나는 순간 어머니를 잃고, 하반신 마비에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 '퍼시'(도미니크 피뇽 목소리)와 쌍둥이 오빠 '길버트'(코디 스밋 맥피 목소리)와 함께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그레이스'와 '길버트'는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주며 힘겨운 유년 시절을 버텨나가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아버지가 볼렉스 카메라로 남매에게 애니메이션을 보여주던 때였는데요. 그 기억은 '그레이스'에게 잠시나마 따스한 보금자리가 되어주었죠.
하지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고 남매는 각기 다른 위탁가정으로 보내집니다. '그레이스'는 방임형 양부모 밑에서, '길버트'는 종교 광신도의 학대 속에서 살게 되죠. 이제 서로에게 닿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편지뿐인데요. 그 외로운 시간 속에서 '그레이스'는 달팽이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보호막 같은 껍데기를 지니고 다니는 달팽이처럼, '그레이스' 또한 자신만의 요새를 만들어 세상으로부터 몸을 숨긴 것이죠.
그렇게 무미건조하게 흘러가던 '그레이스'의 삶에 괴짜 할머니 '핑키'(재키 위버 목소리)라는 빛이 찾아옵니다. '핑키'는 '그레이스'의 첫 친구가 되어주고, '켄'(토니 암스트롱 목소리)이라는 남자와 연애도 하게 되죠. 하지만 '그레이스'의 시련은 계속됩니다. '길버트'의 죽음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그레이스'는 깊은 어둠 속으로 향하죠.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작품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컷마다 미세한 움직임으로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에 경이로움을 느꼈는데요. 엔딩 크레딧에 새겨진 "이 영화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라는 문구는 단순한 제작 방식의 설명이 아닌, 애덤 엘리어트 감독의 철학적 선언처럼 다가오죠. 전 세계가 AI와 디지털 기술로 최대한 효율적이고 완벽한 결과물을 추구할 때, 이 영화는 역으로 '불완전함의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수천 번의 미세한 조정으로 만들어진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시간을 들여 완성한 것 자체가 의미를 갖죠. 하루에 겨우 5~10초 분량만을 촬영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속도'보다 '과정'의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데요. '그레이스'가 달팽이처럼 느리게 나아갔듯이, 때로는 천천히 걷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방법일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엘리어트 감독 본인이 유전적 수전증이 있다는 점인데요. 그는 작업실 곳곳에 '투박하고 삐뚤빼뚤하게'라는 문구를 붙여놓고, 모든 오브제가 어딘가 비대칭적이고 결함이 있도록 만들었죠.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이 만든 듯한 느낌을 의도적으로 추구했다고 하는데요. 감독은 자신의 약점을 숨기는 대신, 그것을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으로 받아들이고 작품 세계의 일부로 승화시켰습니다.
이는 '그레이스'의 여정과 묘하게 닮아있죠. '그레이스' 역시 자신의 약점과 상처를 숨기려 했지만, 결국 그것을 받아들이고 세상으로 나아갈 때 진정한 해방을 경험합니다. "앞이 더 중요한 법이야", "이제 너도 그 껍질에서 나올 차례야"라는 '핑키'의 조언은 '그레이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메시지죠.
한 줄 후기에 '엉뚱하지만 선한 마음'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핑키'라는 캐릭터에 대한 찬사이기도 한데요. '핑키'는 그 자체로 완벽한 정상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선풍기 날개에 손가락이 잘렸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사해에서 수영하고, 80세 생일에 파인애플 판촉 일을 하는 등 기이한 이력의 소유자죠. 하지만 '핑키'의 '엉뚱함'은 '그레이스'를 구원하는 빛이 됩니다.
세상은 종종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 짓고, 후자를 배제하려 하는데요. 하지만 엘리어트 감독은 이러한 이분법을 뒤집죠. 그의 세계에서는 소외된 이들, 변두리에 존재하는 이들이 주인공이 됩니다. 그들은 완벽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 인간적이고, 더 진정성 있는 존재로 그려지죠.
결국, 아카데미 장편애니메이션 작품상 후보에 올랐던 <달팽이의 회고록>은 기술의 발전으로 모든 것이 빠르고, 완벽하고, 세련되게 변해가는 시대에, 우리에게 진정한 인간성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하죠. 수작업으로 만들어낸 점토 인형들의 삐뚤빼뚤한 표정과 움직임이 오히려 더 생생하게 감정을 전달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불완전한 삶을 더 정직하게 반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달팽이처럼 느리게,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 여정 속에 삶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이 영화는 조용히 속삭입니다.
'달팽이의 회고록'은 8년의 제작 기간과 7,000여 개의 오브제를 통해 완성된 작품입니다. 선천성 구개열을 갖고 태어난 주인공 '그레이스'는 쌍둥이 오빠 '길버트'와 함께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랐지만, 부모의 죽음 이후 서로 다른 위탁가정으로 보내지며 삶은 더욱 고단해지죠. 외로움 속에서 달팽이처럼 자신만의 껍데기에 숨어 살던 '그레이스'는 괴짜 할머니 '핑키'를 만나 새로운 희망을 찾아가게 됩니다. 이 영화의 진정한 매력은 완벽함보다 불완전함을 추구하는 제작 철학에 있는데요. 수전증이 있는 감독이 의도적으로 비대칭적이고 투박한 캐릭터들을 만들어낸 것처럼, 주인공들 역시 각자의 상처와 결함을 안고 살아갑니다. ★★★★☆
2025/04/24 메가박스 코엑스
※ 영화 리뷰
- 제목 : <달팽이의 회고록> (Memoir of a Snail, 2024)
- 개봉일 : 2025. 04. 30.
- 제작국 : 호주
- 러닝타임 : 95분
- 장르 : 애니메이션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애덤 엘리어트
- 목소리 출연 : 사라 스누크, 에릭 바나, 재키 위버, 코디 스밋 맥피, 도미니크 피뇽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