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개반이상만 #33] <파과>
중년 남성이 주인공인 액션 영화에 우리는 너무나 익숙합니다. 리암 니슨, 키아누 리브스, 덴젤 워싱턴. 물론 그들의 액션 영화도 훌륭하지만, 한국 영화 시장에서 60대 여성이 주인공인 액션 영화가 등장했다는 것 자체는 신선한 충격이죠. <파과>는 그 도전적인 시도를 넘어 완성도 높은 액션 디자인과 깊이 있는 서사로 충무로 장르영화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40여 년간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을 처리하는 조직 '신성방역'에서 활동한 레전드 킬러 '조각'(이혜영)은 이제 '대모님'이라 불리는 살아있는 전설인데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차 한물간 취급을 받게 되죠. 젊고 혈기 왕성한 킬러 '투우'(김성철)가 '신성방역'의 새로운 일원으로 합류하고, 그는 '조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습니다. 평생 '조각'을 쫓아온 '투우'는 알 수 없는 집착을 보이죠.
스승 '류'(김무열)와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고 약속했던 '조각'은 예기치 않은 상처를 입고, 자신을 치료해 준 수의사 '강선생'(연우진)과 그의 딸에게 남다른 감정을 느끼죠. 40년 동안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온 '조각'에게 닥친 이 갑작스러운 변화는 '조각'의 삶을 뒤흔듭니다. '투우'는 그런 낯선 '조각'의 모습에 분노하며, 두 킬러 사이에 피할 수 없는 대결이 시작되죠. 이 대결은 단순한 직업적 경쟁을 넘어 깊은 인연과 비밀로 얽힌 두 사람의 숙명적 충돌입니다.
'파과'는 흠집이 난 과일을 의미하죠. '투우'는 오래되고 멍든 파과를 보며 "누가 같은 값 주고 이런 걸 사 먹겠어요?"라고 말하며 발로 짓밟는데요. 이 장면은 나이 든 '조각'을 향한 직접적인 은유죠. 그러나 영화는 "보기에는 그래도 맛은 똑같다"는 메시지를 '조각'의 인생을 통해 보여줍니다.
이렇듯, <파과>가 지닌 미덕은 '나이 듦'에 대한 솔직한 묘사인데요. 수전증으로 칼을 떨어뜨리고, 관절이 삐걱거리며, 젊은 시절(신시아)이었다면 손쉽게 제압했을 만한 상대도 사생결단으로 안간힘을 다해야 대적해야 하는 '조각'의 모습은 많은 중년 관객의 공감을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조각'이 지닌 가치, 쓸모, 그리고 존엄은 절대 감소하지 않죠. 그것이 이 영화가 전하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파과>의 가장 큰 승부수는 단연 이혜영의 캐스팅이죠. 올해로 63세인 이혜영은 젊은 배우도 감당하기 힘들어 보이는 강도 높은 액션 장면을 실감 나게 소화했죠. 특히 구덩이에 파묻혀 벌레와 흙에 뒤덮이는 장면,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시멘트 바닥을 구르는 장면 등 이혜영의 헌신적인 연기는 감탄을 자아냅니다. 이혜영의 존재감은 캐릭터의 깊이를 더하죠. 혼자 늙어가는 여자의 고독, '강선생'을 향한 복잡한 감정, '투우'에 대한 연민 등 다층적인 감정 연기로 관객을 사로잡습니다.
여기에 액션 디자인도 인상적인데요. '조각'과 '투우'의 액션 스타일은 철저히 차별화됐죠. 60대 킬러 '조각'의 액션은 흐르듯 움직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단호해지는 '물'과 같고, '투우'는 감정이 격렬하고 매 순간 자신을 태우는 '불'과 같습니다. 이런 대비는 단순한 연출 기법이 아니라 인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장치로 작용하죠.
한편,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파과>는 영화화 과정에서 상당 부분 각색됐습니다. 원작에서 내면적 고민이 만연체로 펼쳐지던 서술 방식을 영상으로 옮기기 위해 비선형적 플롯 구조를 채택했죠.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편집은 때로는 매끄럽지 못한 지점이 있고, 원작 팬들에게는 잘려 나간 서사가 아쉬움으로 다가올 수 있는데요. 그러나 이런 선택이 영화만의 특별한 리듬과 호흡을 만들어낸 것도 사실이죠.
결국, <파과>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늙은 여자 킬러'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마주하게 될 노화와 쓸모에 관한 보편적 질문이죠. 어쩌면 우리는 모두 삶의 어느 시점에서 스스로를 '파과'라고 느낄 때가 있을 것인데요. 그러나 이 영화는 거친 상처와 흠집이 있더라도, 그 속에 담긴 맛은 여전히 달콤하고 깊다는 것을 일깨웁니다. ★★★☆
2025/04/24 CGV 용산아이파크몰
※ 영화 리뷰
- 제목 : <파과> (The Old Woman with the Knife, 2025)
- 개봉일 : 2025. 04. 30.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122분
- 장르 : 액션, 드라마, 미스터리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민규동
- 출연 : 이혜영, 김성철, 연우진, 김무열, 신시아 등
- 화면비율 : 2.3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