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르의 영화영수증 #50] <어브로드>
'태민'(장성범)과 '민지'(임영주)의 관계는 처음부터 불균형하다. 영어에 서툰 '태민'은 '민지'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며, '민지'는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책임진다. 미네소타로 향하는 이 여행 역시 '민지'의 계획이었고, 공항에서부터 숙소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태민'은 수동적인 존재로만 존재한다. 연착된 항공편, 예상치 못한 교통사고, 문 닫힌 렌터카 업체까지, 연속되는 작은 재난들이 태민의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그런데 '민지'가 사라진다. 말 그대로 '증발'해버린다. 잠깐의 외출 후 돌아온 '태민'이 마주한 것은 텅 빈 욕실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진 연인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경찰이 보여준 CCTV 영상이다. 숙소에 들어가는 것은 '태민' 혼자뿐이고, '민지'의 존재를 증명할 그 어떤 물증도 없다. 의존했던 존재가 사라진 '태민'은 이제 홀로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해야 하는데, 그에게는 그럴 언어적, 문화적 능력이 부족하다. 결국 그는 도피자가 되어 진실을 추적하게 된다.
<어브로드>를 연출한 감독 지오바니 푸무는 "한국인이 아니지만 가장 한국스러운, 진짜 한국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역설적인 표현 속에는 이방인으로서 한국 사회를 바라본 그의 독특한 시각이 담겨있다. 흥미롭게도 <어브로드>에서는 이 시선이 뒤바뀐다. 한국인인 '태민'이 미국에서 이방인이 되어 겪는 소외와 편견을 그려내는 것이다.
'태민'이 겪는 상황들은 현실적이면서도 상징적이다. 영어를 못해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외모로 인해 의심받으며,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해 더욱 궁지에 몰린다. 이는 감독 자신이 외국인으로서 겪었을 경험들의 투영으로 보인다. 실제로 '태민' 역을 맡은 장성범은 미네소타 현지 촬영 중 실제로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이러한 진정성은 영화의 긴장감을 더욱 사실적으로 만든다.
<어브로드>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K팝이 영화 창작에 미친 영향이다. 감독과 제작사 써티세븐스디그리는 에스파의 세계관 영상 등 다양한 K팝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샤이니 멤버 태민과 협업했고, 이 경험이 영화의 출발점이 됐다. 주인공의 이름을 '태민'으로 설정한 것은 단순한 오마주가 아니라, 실제 인연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고. 영화 속에서도 K팝은 문화적 교류의 매개체로 등장한다. 차 안에서 태민의 'Want'가 흘러나올 때, 함께 탄 현지 여성이 "태민을 아느냐"고 묻고 주인공이 "내 이름이 '태민'이야!"라고 답하는 장면은 K팝의 글로벌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문화적 연결고리가 어떻게 자연스럽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준다.
<어브로드>는 장르적 문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90분이라는 타이트한 러닝타임 동안 숨 돌릴 틈 없이 전개되는 서스펜스는 관객을 몰입시키기에 충분하다. 특히 미네소타 북부의 아름답지만 고립된 풍경은 '태민'의 심리적 상태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어브로드>의 진정한 가치는 장르적 관습이 주는 예측 가능한 재미 그 이상에 있다. 문화적 차이와 언어 장벽을 관습적인 극적 도구로 소비하지 않고, 현대 사회의 문화적 교류와 충돌을 진지하게 탐구한다. 이는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경험이다.
<어브로드>가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문화적 영감은 어떻게 전이되고 변화하는가"이다. K팝이라는 문화 현상이 이탈리아 출신 감독에게 영감을 주어 한국 배우들이 출연하는 미국 영화가 탄생하는 과정은, 21세기 문화 창작의 혁명적 패러다임을 드러낸다. 기존의 동서양 합작 영화들이 종종 어색한 문화적 봉합의 느낌을 줬다면, <어브로드>는 훨씬 유기적이고 자연스러운 융합을 구현해낸다. 이는 K팝의 글로벌 파급력이 음악적 향유를 뛰어넘어 다른 예술 형태에까지 창작적 영감을 주고 있다는 증거다. ★★★
※ 영화 리뷰
- 제목 : <어브로드> (Abroad, 2023)
- 개봉일 : 2025. 06. 11.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85분
- 장르 : 미스터리, 드라마, 스릴러
- 등급 : 15세 관람가
- 감독 : 지오바니 푸무
- 출연 : 장성범, 임영주, 토니 덴먼, 크리스 칼슨, 크리스티나 볼드윈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